▲ 보문사에서 경주 토함산 석굴암을 묘본으로 조성한 석굴암. 사진 제공 보문사

한국불교에도 여자 스님을 뜻하는 비구니 스님이 세운 종단이 대한불교보문종(大韓佛敎普門宗)이다. 한국불교에서 대한불교조계종이 큰 집이라면 천태종, 태고종, 진각종, 원불교 등 여타 불교 종단과 함께 대한불교보문종도 불교 종단협의회에 속하지만, 세계에서 유일한 비구니 종단이라고 한다.

불교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양모(養母)이자 최초의 출가 비구니이였던 대애도 구담미(大愛道 瞿曇彌, Mahapajapati-Gotami) 스님이 비구니 스님의 초조이다. 근현대에 이를 계승,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을 세운 스님이 바로 긍탄(亘坦 1885~1980) 스님이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 성북구 보문로 보문사를 중창한 긍탄 스님과 그 제자 보암당 은영(恩榮 1910~1981) 스님이 중심이 됐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사길 20에 있는 대한불교보문종의 총본산인 보문사는 고려 예종 10년인 1115년 담진(曇眞) 국사가 비구니 스님 수련장으로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부터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사찰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보문사가 위치한 곳은 '탑골승방'이라는 불렀다고 한다. 보문사는 도성 밖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했던 4대 비구니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비구니 스님들이 스스로 세운 비구니 종단은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여기에도 사연은 있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강제적인 불교 왜색화에 찌든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불교 정화개혁이 해방과 함께 들불처럼 일었다. 지난 1962년 출범한 통합종단을 둘러싸고 비구승단(출가 후 결혼하지 않은)과 대처승단(결혼해서 사는)의 대립이 격화되는 이른바 불교 정화개혁이 끊임없이 전국 사찰에서 일었다. 보문사 역시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자 긍탄스님과 은영스님은 비구니 스님들을 중심으로 1971년 재단법인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고,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환경을 지키기 위해 1972년 비구니 종단인 대한불교보문종을 창종했다고 한다.

지난 2017년 극락보전 중수 불사를 진행하던 중 발견된 온전한 상태의 상량문에는 조선 영조 23년인 1747년에 최초 중건, 고종 2년인 1865년에 2차 중수했다는 기록과 함께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라는 내용과 복장물이 나왔다.

극락보전 상량문에 따르면 보문사는 1800년대부터 줄곧 비구니 스님들이 상주하면서 수행·정진했다는 사실과 특히 왕실 발원 사찰로 조선 왕실의 시주를 받아 불사를 진행하고 후궁과 상궁 등 궁인에서부터 사대부, 평민에 이르기까지 불사에 동참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특히 상량문과 더불어 상량 복장물에서는 왕실에서 하사한 연(輦) 수식(오색 끈, 매듭)과 인로왕번(引路王幡)을 비롯해 조선 후기에 제작한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보살도, 조선 전기에 제작된 묘법연화경 등도 나왔다.

보문사는 조선 후기 한양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에도 옥수동의 두뭇개 승방, 석관동의 돌곶이 승방, 숭인동의 새절승방(청룡사)과 함께 비구니 탑골승방이라 불렀다고 한다. 탑골승방은 비구니 스님들이 거처하는 성 밖의 네 니사(尼寺 여자 스님들이 거처하는 사찰)로 이곳이 왕비와 후궁들의 기도처였다고 한다.

특히 보암당 은영 스님이 지난 1971년에 오갈 데 없는 여신도들을 위해 설립한 양로원인 시자원(施慈院)에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황후와 황후를 모셨던 궁녀들이 여생을 보낸 곳이었다. 말 그대로 조선 왕실의 여신도들이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찰이었다.

현재 보문종 종단 소속 사찰은 40여 개로 소속 비구니 스님 200여 명이 함께 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등 해외에도 국제포교를 위해 6개소의 사찰을 두고 있다고 한다.

비구니 스님들이 스스로 세운 종단인만큼 세간의 관심이 높은 대한불교보문종 보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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