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해사 극락보전. 사진 제공 은해사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衆中無盡)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해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銀海寺)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은해사를 거쳐 간 역대 고승과 근현대사에 한국 불교를 이끈 스님 덕분에 은해사는 특히 조명을 받는 절이기도 하다.

신라 시대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거대 담론으로 화쟁 사상을 설파한 원효 스님과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신 의상 스님에 이어 고려 시대에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인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저술한 보각국사 일연스님 등의 고승을 배출한 곳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은해사에서는 매년 일연스님과 원효스님의 추모 다례 제를 열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홍진 국사가 머무른 뒤부터 선교양조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높아졌고, 화엄학의 대강백으로 이름을 떨친 영파성규 스님이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은해사는 경북 영천시 청통면 청통로 951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 경북지역 5개 본산 중 하나이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인 809년에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인 해안사(海眼寺)에서 조선 시대 은해사로 사찰명이 바뀌었다.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하는 과정에서 정쟁의 피바람 속에 숨진 원혼을 달래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했던 것으로 사적기는 소개하고 있다.

해안사 창건 후 고려 시대 원종 11년인 1270년에 홍진 국사가 중창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돼 이듬해인 1546년 명종 원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 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때 태실봉 아래 인종의 태실을 봉안한 것을 계기로 은해사라고 절 이름이 바뀌게 됐다고 한다.

숙종 38년인 1712년에는 은해사를 종친부(宗親府)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왕실의 후원으로 사찰 입구 일대에 심은 소나무들이 3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은해사를 외호하고 있다.

특히 영조는 왕자 시절에 이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을 지어 보낸 일이 있었다. 이후 왕으로 등극 후에는 어제완문(御題完文)이라 하여 이 절을 수호토록 했다.

왕실과의 인연 덕분에 1847년 헌종 13년에 은해사 창건 이래 가장 큰불이 나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됐지만, 복원도 대대적으로 이어졌다.

인종의 태실 수호사찰이자 영조의 어제 수호 완문(御題 守護 完文)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인 만큼 왕실을 포함한 수만 냥의 시주 덕분에 3년여간의 불사 끝에 헌종 15년 1849년에 다시 복원됐다고 한다.

이때 복원된 은해사 편액,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각, 노전의 일로향각 다섯 점이 추사 선생이 쓴 글씨라고 한다.

추사 선생은 안동 김씨와 세도 다툼에 패해 55세 되던 헌종 6년인 1840년 9월 2일에 제주도로 유배돼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 14년인 1848년에 방면, 다음 해 봄에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유배 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 선생은 영파 대사의 옛터이며 또 자신의 진 외고조인 영조 대왕의 어제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은해사와 오랜 인연 때문에 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근현대에는 향곡, 운봉, 성철스님 등이 주석했고, 비구 선방 운부암, 기기암과 비구니 선방 백흥암 등에서 100여 분의 스님들이 산 내 암자에서 수행 중이라고 한다.

또한, 한국불교 최고의 경율론 삼장법사과정을 한국 불교의 강백들이 수학하고 있는 ‘종립 은해사 승가 대학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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