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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 베푸니 성공이 따라오네요"강원도 춘천시 요선동 김영희 '동대문곱창' 사장 인터뷰
  • 송호길 기자
  • 승인 2020.03.01 17:46
  •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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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5평짜리 포장마차로 시작해  

  50석 수용 가능 곱창집으로 '탈바꿈'

- 홀몸에 아들 둘 키우며 시어머니 모셔   

 건물주 되기까지 많은 역경 지나와  

 눈물 훔친 나날손님들 격려로 버텨

- 소소한 유머로 단골손님 발길 잡아 

  '코로나19' 여파에도 큰 타격 없어

- 가게는 보금자리이자 행복의 원천… 

장사 초기부터 큰 것 바라지 말고 손님과의 약속 지키다보면 좋아져

 

 

 

 

 

 

 
▲ 김영희(62) 사장은 강원도 춘천시 요선동에서 1996년부터 24년째 요식업을 경영해왔다. 그가 현재 운영 중인 '동대문곱창' 가게안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현수 기자

[일간투데이 노덕용 선임기자, 송호길 기자] "이모님, 소주 한 병 주세요." "이모가 갖다주면 한 병에 5000원인데 손님이 직접 꺼내 드시면 4000원인데 어떻게 할까요(웃음)."

소주 한 병을 4000원에 팔고 있지만, 손님들에게 소소한 웃음을 주기 위해 가게 사장이 한 말이다. 강원도 춘천시 요선동에서 1996년부터 24년째 요식업을 경영해 온 김영희(62) 사장의 일화다. 미쳐 알바가 도착하기 전에 손님이 밀어 닥치면 재치있게 넘기는 것이다.

그의 유머는 다채롭다. 손님이 소주를 달라고 하면 김 사장은 쿨하게 갖다 먹으라고 한다. 당황한 손님은 "직접 꺼내 마시면 할인해주느냐"고 묻자, 김 사장은 "이미 할인된 가격"이라고 응수한다.

김씨는 지난 26일 오후, '동대문곱창' 가게의 성공 비결을 묻는 말에 "항상 유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주효한 것 같다"면서 "항상 손님들의 반응이 좋았고 계속 찾아오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여든일곱이신 시어머니를 모시며 사는 그는 이 지역에서 딸같은 효부로 통한다. 그는 시어머니를 노인복지관에 보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김씨는 서른 여섯살이었던 때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당시 양말도소매를 하던 김씨는 공교롭게도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기 위해 가계수표를 남발했다가 빚을 떠안게 됐다. 이 때부터 생계에 위협을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 1억5000만원을 넘어섰다. 그런데도 시댁은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시댁이 초등학교 3학년, 1학년 두 아들을 돌봐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거리로 내몰리게 될 처지에 몰렸음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시댁을 많이 원망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런 시댁의 뜻을 자녀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주변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어렵지 않냐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빚을 진 며느리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을텐데,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니 마음이 풀리셔서 친딸처럼 잘해주셨습니다."

"2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낳은 자식은 스스로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시댁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김씨의 얘기다.

그는 1996년부터 5~6평짜리 포장마차에서 라면과 칼국수, 소주 등 야식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세 테이블로 시작한 조그마한 포장마차 가게는 현재 50석을 수용할 수 있는 곱창집으로 탈바꿈했다. 김씨가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 것은 단골손님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면서부터다. 시장터에서 하루도 안 거르고 2000원짜리 한 그릇이라도 더 팔기 위해 새벽 5시까지 가게를 지켰다. 낮에는 아이들 양육과 집안 살림을 하고 오후부터 새벽까지 야간영업을 했다. 해가 훤해진 아침 8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힘들어 눈물을 훔치는 게 일상이었지만 단골손님들의 격려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지난 26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손님에게 신뢰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눈 앞에 있는 이익을 챙기기보다는 진정성 있게 행동해야 훗날 손님이 '큰 손'이 되어 돌아온다"고 덧붙였다. 사진=김현수 기자

"라면 한 그릇이라도 배달을 마다하지 않으며 진정성 있게 손님을 대했습니다. 이들은 훗날 오만원, 십만원씩 지갑을 크게 열었습니다. 같은 동네에서 20여 년간 밀려드는 손님들 덕분에 하루하루가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현재의 제가 있게 된 이유죠."

"영업장은 저의 보금자리이자 행복의 원천입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을 묻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매일 자신의 음식을 먹고 기뻐할 손님들 생각에 피곤함도 모른 채 새벽 6시까지 일했다고 한다. 장사 초기에는 손님들이 오면 구석으로 숨기 일쑤였다. 무섭기도 하고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재기를 위한 그의 노력으로 3년 뒤에는 어느 정도 가게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던 중 2000년에는 근처에서 장충동 족발집을 창업했다. 그에게 족발집 창업은 인생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도전이었다. 부산에서 족발집을 크게 운영한다는 한 손님이 김씨가 애처로워 보였는지 자신의 족발 노하우를 선뜻 전수해주겠다고 자청했다고 한다.

"그분이 저의 행운의 여신이었죠." 3개월 만에 족발 기술을 터득한 김씨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양념을 개발해 자신만의 족발을 만들었다. 그는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배달 기사의 숫자를 점차 늘렸고, 가게 앞에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자 건물주가 월세 인상을 요구해 가게를 이전하기도 했죠"라며 멋쩍어했다.

동대문곱창 가게의 성공 비결에 대해 그는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며 "단골손님을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했다. 사진=김현수 기자

현재 운영 중인 동대문 곱창집은 폐업 위기에 놓여 있던 지인의 가게를 2003년 인수한 것이다. 그간 지역 내에서 다져놓은 그의 입지는 폐업의 위기를 재기의 기회로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포장마차를 운영했던 과거 노하우를 동원해 곱창의 맛과 반찬을 바꾸면서 입소문을 타며 손님은 늘어갔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의 성공 사례는 자영업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김씨는 20여 년간 모은 돈으로 두 아들 모두 장가를 보냈다. 아들의 결혼식 날에도 혼인이 끝난 뒤 바로 영업장으로 돌아와 영업한 결과다. 큰아들은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했다. 작은며느리는 최근 강원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씨는 자가아파트를 마련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고 곱창집 근처에 있는 38평 규모의 2층짜리 건물주이기도 하다. 3년 전에는 350평에 달하는 토지도 매입했다.

과거보다는 다소 풍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하루를 게을리 보내지 않는다. 오전에는 밭에서 손님상에 차릴 부추와 상추 등을 재배한다. 밭에는 현재 29마리의 분양견과 유기견을 키우고 있다. 과거 힘들고 외로웠을 때가 생각나서 갈 곳 없는 강아지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나둘 유기견들이 모여졌다. 오후 4~5시에 가게 문을 열고 새벽 3시가 돼서야 문을 닫는다.

그는 1996년부터 5평짜리 포장마차에서 라면과 칼국수, 소주 등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현재는 50석을 수용할 수 있는 곱창집을 운영하고 있다.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 배경을 묻자 "단골손님 덕분"이라며 공을 돌렸다. 사진=김현수 기자

어려운 여건에도 어려운 이들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그만의 경영 철칙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함께해온 손님들이 현재에도 왕래하고 있어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확산으로 인해 자영업자들이 고통받고 있지만 김씨는 크게 타격을 입지 않는다고 한다. 코로나 19 여파에 손님이 체감상 10명 중 8명으로 줄어들었지만, 단골손님들이 있기에 걱정 없다고 했다.

창업을 꿈꾸는 초심자들에게 조언을 구하자 그는 "처음부터 큰 것을 바라지 말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장사가 안돼 집에 일찍 들어가면 안 됩니다. 손님들에게 약속한 시각에 가게를 열고 닫아야 합니다. 생일에도 쉬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라며 웃어 보였다.

김씨는 20여 년간 모은 돈으로 두 아들 모두 4년제 대학에 진학시키고 장가도 보냈다. '내 집 마련'을 하고 시어머니와 모시며 단둘이 살고 있다. 38평 규모의 2층짜리 건물도 소유하고 있으며 3년 전에는 350평에 달하는 토지를 매입했다. 사진=김현수 기자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김씨는 두 아들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는 "처음 포장마차를 시작하게 된 것은 두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 저는 행동 하나하나 거짓 없이 살아왔음을 자신합니다. 자녀들이 유년 시절 시부모 밑에서 삐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 줘서 고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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