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또다시 한반도를 짓밟은 일제강점기 시절 국민은 아사와 변절이라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인지 밥과 권력을 위해 일제를 위해 변절할 것인지였다.

일제 앞잡이를 자원하면 대대손손 호의호식이 보장된 길이었지만 오로지 대한민국을 되찾겠다고 나선 수많은 이들은 일제 앞잡이 순사들에게, 또는 일본군의 총에, 그리고 일본놈들 성 노리개로, 어떤 이들은 중국으로 전선을 넓히는 과정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아사했다.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읽었던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서울 명동 한복판 대대손손 물려받은 수만 평의 땅 지금으로 치면 수조원을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그 땅을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투쟁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 식솔들은 쌀이 없어 굶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 이회영 가문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양산 통도사 구하 주지 스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통도사 사답(절 소유 땅)을 팔아 독립투쟁에 나선 이들에게 군자금을 포함한 수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구하 스님은 이를 숨기기 위해 양산에서 인근 거리인 부산 기생집에서 매일 술 파티를 여는 것처럼 속여 기생들에게 누가 오거든 이 돈을 꼭 전달해달라는 밀지를 남기고 본인은 술을 마신 것처럼 가짜 영수증을 받아왔다고 한다. 이러니 그 악랄한 일제 순사들은 구하 스님이 호색을 즐기는 줄 알고 감시의 눈길이 느슨했다는 이야기다. 해방 후 많은 이들이 구하 스님의 행장을 오해하고 친일한 것으로 친일 승려로 매도했지만, 월하 스님이 사형인 구하 스님의 유품을 챙기는 과정에서 그 비밀 영수증을 발견, 스님의 무애행이 독립군을 위한 것임이 밝혀졌다.

의열단을 비롯한 대한민국 독립투쟁사에 이 같은 수많은 투쟁사 속에서 한 가지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투명했다. 한 푼의 돈도 허투루 다루지 않고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본인 식솔들이 끼기를 못 때워 굶어 죽어가는데도 말이다.

한 결 같은 마음이었다.

여기서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전 이사장에게 묻고 싶다. 시민운동중 가족 중에 아사 한 사람이 있었는지, 일본군 강제위안부 할머니들에게서 왜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아무 말을 못 하는지 묻고 싶다.

일제 강점기 시절 억울한 사연을 당한 이들을 위해 시민운동에 나섰다는 것은 누구도 선 뜻 나서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안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성 노리개로 끌려간 꽃다운 나이의 그들을 위해 30여년을 함께 했다는 것은 제 2의 독립운동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살아 있는 동안 일제강점기의 한을 국민을 대신해 풀어주려 했던 초심은 평가받을 만 하다.

하지만 정의기억연대가 설립 당시 취지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도록 헌신해야 그 평가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최근 불거진 공방은 시민단체를 바라보는 국민에게 진정성을 되묻게 한다. 우리는 한센병 환자들의 집단촌인 소록도에서 수녀로 평생을 봉사하며 떠나는 길에 달랑 편지 하나 남기고 간 수녀들을 기억하고 있다. 봉사와 헌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의응답을 남긴 분들이었다.

윤미향씨는 숨어있지 말고 이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떳떳하게 공개하고, 그 공개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면 미숙했다면 본인이 책임을 지면 된다.

그리 쉬운 해명이 그리 어려운지 묻고 싶다.

얼마남지 않은 제21대 국회 개원을 코앞에 두고 면책특권을 바란다면 집권여당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길 수 있다. 또 시민단체의 시민운동에 적지 않은 부담을 줄 수 있다.

문제가 불거졌을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방법중 하나는 사과하고 책임지는 모습이다. 이를 부정하는 순간 사상누각이란 말도 있고, 공든 탑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봐 왔다. 더 뒤로 숨을 일이 아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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