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훈 박사(서경대학교 나노융합공학과 학과장)
[김종훈 칼럼] 지금 전 세계는 느린 보폭으로, 하지만 멈춤 없이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은 줄어든 보폭을 비난할 때가 아니라 좁아진 보폭으로 어떻게 다른 경쟁자들을 앞설 수 있는지 고민하고 대안을 내야 할 때다.

우리나라의 보폭이 이전보다 3% 느려 졌다고 질타하는 보도를 보았다. 하지만 지난 몇 달 간 그 보폭이 32%나 줄어든 미국도 있다.

초등학교 때 등교 때면 사시사철 매일 보는 등산객이 있었다. 등산 스틱 하나 제대로 팔지 않던 시절에 T자 지팡이 하나에 온 체중을 얹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한 발자국에 1cm씩 손톱만큼 걸음을 옮기는 분이셨다.

이 분을 매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의 등교 시간이 빠르건 늦건 5분이면 지나는 길을 한 시간 넘게 걸려 지나치시기 때문이었다.

뇌졸중 등으로 뇌에 손상이 남아 그러셨으리라 짐작한다. 이 분의 말도 안 되는 등산을 요즘처럼 비가 오는 장마철에도 혹한에도 예외 없이 볼 수 있었다.

고3, 아침 자율학습을 위해 아침 7시 10분이면 등교하던 그 길을 지팡이를 짚고 아주 천천히 걸으실 수 있게 됐다.

대학원 시절엔 등산복 꼬까옷 훨훨 멋진 걸음, 때로는 주변 분들과 환한 웃음을 나누며 산에 오르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2년 이상 어제와 오늘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그 분의 보폭이 넓어지는 것을 보았다. 다만 세월을 속일 수는 없는 지라 머리에만 하얀 눈이 내려 있었다.

그 후로는 나의 등하교 길에서 그 분을 마주치는 일이 줄었다. 순식간에 지나셨을 테니. 나의 삶이 바닥일 때도 혹은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이 들 때도 그 분 걸음 1cm를 생각한다.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비대면 교육을 근간으로 소화해 낸 1학기는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께도 학생들에게도 모두 고통스러운 걸음걸음을 요구했다.

타국에서 찬사를 보내 마지않는 이 길이 우리에게 어려웠던 것은 쉬어 갈 곳도, 탈출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도는 교과서의 쪽수로 정해져 있었고, 과제는 그 쪽수만큼 무거웠으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교육을 사수하는 것이라는 정언 명령에 매달려 살았지만 참 힘든 시간이었다.

이런 교육의 문제점을 살펴보려면 이른바 ‘범생이’들의 삶을 살펴보면 된다. 그들이 힘써 배운 것은 기존 교육체계에서 무게를 많이 실었던 부분이고,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기존 교육체계에서 잘 배울 기회가 없었던 부분이다.

2박 3일 국내 에스코트를 맡았던 프라운호퍼 연구소 다이아몬드 합성의 대가 코이들 박사도 여가 시간에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기억된다.

칼텍의 콘스탄티노스 교수는 자동차 수집광으로 기억된다. 첫번째 석사과정 때 국내 최초 프로 레이싱 팀에서 일했던 경험이 서로 더 가까워진 계기가 됐다.

최초의 리튬이차전지 양산품을 만들었던 400년 기업 일본 유아사의 임원은 내 세미나 발표를 들을 때는 청중 1,2,3.. 중 하나였는데, 저녁 식사 내내 자신이 소유한 혼다 NSX에 대해 이야기가 되는 엔지니어로 만나고는 ‘나보다 더 자동차에 미친 녀석..’이라며 친구가 되었다.

교과서로는 다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사업과 기술개발의 근간인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러니 교사-교과서-학생-과제-평가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과서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때다.

일례로, 자동차의 헤드램프 하나를 교체하는 일도 매우 가치 있는 교육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안전하게 교체하기 위해 꼭 장갑을 끼는 일부터, 매뉴얼을 꼼꼼히 보는 일, 전구의 W(와트) 수를 확인하는 일, 전구가 H7인지, D3인지, D1S인지 규격을 맞추어 보는 일에 대하여 배울 수 있다.

안전하게 램프를 교체하고 나면 찾아오는 성취감을 바탕으로 다른 부품도 난이도가 낮은 것부터 만져 볼 용기가 난다.

좀 더 관심이 생기면 헤드램프가 텅스텐 필라멘트에 할로겐 가스를 주입한 할로겐램프인지, 플라즈마 방전을 기반으로 한 HID 램프인지, 발광다이오드로 이루어진 LED 램프인지도 궁금하게 되고 관련 지식을 실물과 연계하여 축적할 수 있게 된다.

연계된 지식은 간단한 오옴의 법칙, 전기에너지 계산부터, 반도체 공정의 기본인 플라즈마 방전, LED 소자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기술개발 역사를 담고 있다. 반복교체를 돕는 기부의 효율적인 설계에 대하여 배우는 것은 아름다운 덤이다.

교과서의 문제는 학문 체계를 완성한 석학들, 대가들에 의해 집대성되었다는 사실 자체다. 그 분들은 지식의 초기 발현부터 응용까지 모두 이해하고 있는 분들이다. 하지만 인류가 지난 수천년 간 습득해온 지식은 그런 교과서적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자연스런 지식습득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기초부터 응용까지 꾹꾹 눌러 순서대로 배우게 하는 것이 주입식 교육이다.

유치원생에서부터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동기부여’가 먼저여야 한다. 인류의 역사가 위대했고, 지금도 위대한 역사와 지식이 만들어 지고 있는 이유는 ‘동기’다.

비대면 교육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물리학, 역학을 가르치기 전에 미션투말스나 그래비티 같은 영화를 보여주면 어떨까. 인종차별, 여성인권, 그리고 수학을 가르치기 전에 나사의 첫 흑인 연구원을 다룬 히든피겨스를 보여주면 어떨까. 기계설계의 묘미와 뜨거운 엔지니어의 열정을 가르치기 위해 포드v페라리를 보여주면 어떨까.

우리 아이들에게 글자와 알록달록 칠해진 그림으로 이루어진 교과서보다 훨씬 큰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수단이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학부모인 우리들은 당당히 그런 교육수단의 사용에 대해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평가’다. 장학금이 성적순이 아닌 것으로 되어가는 요즘, 평가도 줄세우기가 아닌 분야별 성취를 나타내는 공정한 증빙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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