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팻말이 있었던 곳이 있다. 국가정보원(국정원) 뜰에 새긴 팻말이다. 드러나지 않는 곳인 음지에서 일하지만,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양지를 지향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국정원은 숱한 수난사를 겪어오는 과정에서 주요 고비마다 밀사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팻말의 의미는 더 와 닫는다. 문재인 정부 들어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 활동이 폐지되고 명칭은 그대로 유지됐다는 뉴스와 함께 박지원 국정원장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를 만나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이은 새 한일 공동선언을 제안했다는 소식도 잇따라 나와서 국정원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 부처 이름 바꾸기를 밥 먹듯이 해왔던 관행에서 국정원은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댓글 공작을 통한 여론 조작 등으로 정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 상황에서 국정원은 대외안보정보원으로 명칭이 바뀔 뻔했다. 그 국정원에 새로 수장이 된 박지원 원장이 새로운 한일 관계를 위한 밀사로 신임 일본 총리를 만났다는 소식은 국정원의 존재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대외 외교를 담당하는 외교부가 아닌 국정원이 나서서 한일 관계 현안을 푸는데 나섰다는 점 때문이다. 통상 남북 정상 관계를 담당했던 국정원이 보폭을 넓힌 셈이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박지원 원장이다. 박지원 원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문화부 장관 자격으로 2000년 4월 8일 북경에서 북측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밀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자리를 떠나 국익을 위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번엔 국정원장 자격으로 첫 대외 업무로 신임 일본 총리와 한일 관계 복원에 나선 점으로 미루어 향후 대미, 대중 관계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일본 정계 2인자라는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과 ‘의형제’일 뿐만 아니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도 절친한 친구로 알려져 향후 한미 중일 관계를 풀어갈 또 다른 동력을 확보한 셈이다. 이를 통해 남북 현안도 슬기롭게 풀어갈 것으로 기대된다.

당장 한일 간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와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 그리고 다음 달로 예정한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를 풀어가는데 국정원이 밀사 역할을 자처했다는 분석들이다. 일본 정계 2인자를 통해 총리와 한일 관계를 풀어가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점은 공직은 국익을 위한 길임을 보여준 자세이다.

또한, 박 원장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도 거의 40여 년 가깝게 친분을 쌓고 있을 만큼 돈독한 사이로 알려져 향후 대미 외교에도 적잖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조 바이든 당선인이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꼽는데 박 원장이 가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지난 1970년대 초반 미국 뉴욕에서 사업을 시작한 박 원장은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 망명 생활을 하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좌할 당시 상원의원이던 조 바이든 당선인을 소개한 인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지난 총선 때 목포 지역구 국회의원에서 낙선 이후에도 국가를 위해 할 일이 남아있다며 왕성한 방송 패널로 활동하던 중 뜻밖에 국정원장으로 발탁된 점은 돌이켜보면 국익을 위한 ‘신의 한 수’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서 그로부터 20년 후 한반도 정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남북 간 공존을 위해 조력자로 나서야 하는 주변국에 가장 신뢰할 만한 밀사로 다시 등장했다는 것만으로 그렇다.

공직을 개인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치부수단으로 이용하는 지난날의 국정원 모습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자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 행보이다. 박지원 원장이 국정원의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지 주목되지만 기대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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