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회)에서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를 막거나 기타 필요에 따라 합법적 수단을 동원해 의사 진행을 지연시키는 무제한 토론인 필리버스터를 놓고 여야 간 공방은 싱겁게 끝났다. 국회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률개정안,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내용의 '국정원법 개정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려는 야당이 의사진행 발언을 통한 합법적인 지연 작전인 필리버스터를 이번에는 국민의힘 당이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그 법안들은 통과됐다. 야당인 국민의힘 당이 합법적인 지연 발언으로 법안 통과를 저지시키려 했지만, 공염불이 된 셈이다.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한 여권이 3대 권력기관 개혁 입법 중 공수처법 개정안과 국정원법 개정안을 필리버스터 종결 동의 건을 들고나와 표결로 처리시킨 뒤 가결했기 때문이다. 종결 동의의 건이 가결되려면 재적의원 5분의 3(180석)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지만, 더불어민주당과 범여권 소수당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이 찬성해서 종결에 동의했다. 지난 2012년 국회선진화법에서 도입한 필리버스터 종결 동의 건이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필리버스터는 국회에서 거대 여당의 입법 독주에 맞서 소수 야당이 해당 법안의 입법을 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권이지만 반대로 필리버스터 종결 동의 건은 무의미한 시간 끌기를 끝내는 보조 장치라는 점에서 이 또한 합법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12년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 필리버스터가 표결로 종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회는 14일에도 일명 '대북 전단살포금지법'(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이틀째 이어간다. 제21대 국회에서 세 번째 필리버스터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은 다시 '무제한 토론종결 동의서'를 제출한 상태다. 국회법에 따라 제출 24시간 이후인 이날 저녁 종결 여부를 또다시 표결에 부칠 것으로 보이지만 이 역시 표결로 처리될 전망이다. 거대 여당과 이에 동조하는 소수당이 공조하면 필리버스터 자체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보여준 예이다. 물론 이 같은 제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영국·프랑스·캐나다 등에서 시행되고 있으므로 가타부타 잘못된 제도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필리버스터도 형식도 갖가지다. 우리가 봐왔던 장시간 연설, 규칙 발언 연발, 의사 진행 또는 신상 발언 남발, 요식 및 형식적 절차의 철저한 이행, 각종 동의안과 수정안의 연속적인 제의, 출석 거부, 총퇴장 등이다. 하지만 이번처럼 막말을 쏟아내거나 책을 들고나와 읽는 등의 폐단 또한 적지 않기 때문에 해당 의원의 발언 시간을 제한하거나 토론종결제 등의 제도를 각국이 도입했다. 우리 국회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에 그 토론종결제가 첫선을 보였다. 이 때문에 야당인 국민의힘 당이 입법 저지에 실패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필리버스터를 가장 처음 한 국회의원은 지난 1964년 당시 의원이었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당시 야당 초선 의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동료 의원인 김준연 자유민주당 의원의 구속동의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5시간 19분 동안 발언해 결국 안건 처리를 무산시킨 기록이 있다. 이후 필리버스터는 1973년 국회의원의 발언 시간을 최대 45분으로 제한하는 국회법이 시행되면서 사실상 폐기됐다가 2012년 국회법(국회선진화법)이 개정되면서 부활했다. 2012년 개정된 '국회법 제106조2'에 따르면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 토론을 하려는 경우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하고, 의장은 해당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 토론을 할 수 있다. 일단 해당 안건에 대한 무제한 토론이 시작되면 의원 1인당 1회에 한해 토론을 할 수 있고, 토론자로 나설 의원이 더 없으면 무제한 토론이 종결된다. 또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무제한 토론의 종결을 원하고 무기명 투표로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종결에 찬성할 때도 무제한 토론이 마무리된다. 그러나 무제한 토론의 효과는 해당 회기에 국한되므로, 무제한 토론을 하던 중 회기가 종료되면 해당 법안은 자동으로 다음 회기 첫 본회의 표결에 부쳐진다.

국회가 도입한 제도치고 이번처럼 필리버스터의 양면을 제대로 보인 사례도 없을 것 같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으로 국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국에 전 국민이 가슴을 졸이고 있는 가운데 국회에서는 막말도 모자라 법 취지와 다른 한가롭게 독서를 즐기는 어처구니없는 필리버스터가 왜 필요 없는지를 보여줬다. 모처럼 국회의 자정 기능이 발휘됐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