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적 '화(和)', 집단 내 동화, 외부인에 대한 배척 의미
개인과 집단의 조화보다 개인의 일방적 수용 강조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는 이렇게 정리한다.
"'사'가 일본에서는 문지방 안의 자가(自家)의 세계(집·가정·자신)로서 그 영역을 인정받고 있었던 만큼 그것을 '없앤다'는 것은 '사'에게는 비극적인 일이었지만 국민은 '국가=공'을 위해 가족이라는 '사'의 영역을 버렸으며 자신의 재산과 생명이라는 '사'의 영역을 버리고 전쟁에 종사했던 것이다."
'공'은 '사'의 은폐와 희생으로 드러나고 또 그렇게 드러내야 하는 영역이었다. 한편에서 보면 공은 사적 영역의 주체적 희생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이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애당초 사적 영역을 희생할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세계이기도 했다.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가 일본인들은 저마다 '인격적' 판단을 한다지만 그 인격적 판단이라는 것이 실상은 작은 인격들에 대한 '비인격적 지배' 메커니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철학자 사쿠타 케이이치(作田啓一)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집단 구성의 원리를 '자격에 의한 집단'과 '장(場)에 의한 집단'으로 나누는데 일본인은 자신을 소개할 때 기자나 카메라맨 같은 개인적 '자격'보다는 TV방송국처럼 자신이 소속된 '장'으로 소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도 '사'보다는 '공'을 앞세워온 오랜 분위기의 반영이다.
이어서 '사(私)가 있으면 한(恨)이 생기고 한(憾)이 있으면 같아질 수 없고 같아지지 않으면 사(私)로 인해 공을 방해한다'(凡夫人有私必有恨, 有憾必非同, 非同則以私妨公)고 선포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화(和)'가 타자 긍정의 조화보다는 공(公)을 드러내기 위한 '일치'에 가까웠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조화'(和)라는 이름의 '일치'(同)에 익숙했고 국가는 개인의 자기 부정을 담보로 당당하게 존재하는 구조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한·중·일 삼국에서 공공철학을 대중화해온 김태창은 이렇게 정리한다.
"일본에서 중시되어온 조화[和]는 한 그룹 '내'에서의 동화·동호·동행과 외부인의 배척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기와 타자 '사이'에서 함께·서로·상대를 중시하는 상화(相和)와는 전혀 다르다", "종래의 일본적 '화'는 실로 '동'(同)이었다…과거에 '화'가 '동'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폭력적인 동화·강제로서의 침략전쟁으로 나아갔는데 바로 여기서 커다란 참극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정서가 전쟁과 같은 국가적 중대사 앞에서는 '화(和)'라는 이름으로 개인은 감춰지고 국가 이데올로기가 전면에 등장하는 모양새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화(和)가 상생적(相生的)이었다기보다는 한쪽의 희생을 전제한 멸사적(滅私的)인 성향이 있었다는 말이다.
전후 일본 최고의 정치사상가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일본에서의 정신적 균형은 개인의 안과 밖의 조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밖의 일방적 수용을 통해서 유지되는 병리적인 것이었다"고 규정했던 것도 전체 지향의 일치를 공(公)의 영역으로 삼아온 일본적 모습을 잘 진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흐름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지금도 '국가'라는 전체를 넘어서지 못하거나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말처럼 "선과 악의 구별도 전체의 신성한 권위에 귀의하는가 아닌가"에 두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천황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공적 태도의 기준으로 삼아오던 정서가 지금도 일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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