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훈 박사(서경대학교 나노융합공학과 학과장)

[일간투데이 김종훈 칼럼리스트] 코로나 19 확진자 수는 세계적으로 9500만 명, 이번 달 안에 1억 명을 넘을 전망이고, 사망자만 200만 명이 넘었다.

그런데 일부 교회가 종교의 자유라고 항변하면서 방역당국의 지시를 거부하며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행동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려면 양심을 속여야 한다.

종교는 변하지 않는 진리에 대해 알아 가고, 이에 비추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일 터인데, 집회를 갖는 장소, 종교권력을 세습하는 것, 지도자의 부정에 눈 감는 것, 그리고 지도자 자체를 진리의 일부라고 순진한 신도들을 호도하여 전위대로 동원하는 일은 멈추어야 한다.

작고하신 김정흠 교수님의 수리물리 강의는 손꼽히는 명강의 였다. 이공계 캠퍼스에서 가장 큰 강의실이었지만, 일찍 자리를 잡지 않으면 강의실 뒤에 서서 강의를 들어야할 정도로 공대생들의 청강도 많았다.

과대표의 차렷/경례로 시작되고 끝나는 강의의 경직성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빨간 뿅망치를 들고 다니셨다. 뿅망치로 뿅! 교탁을 치시면 모두 ㅋㅋㅋ 웃고 과대표는 일어나 인사를 했다. 강의 끝도 마찬가지.

어느 날 수에 대한 질문들을 하셨다. “수란 무엇이지?’, “실수와 허수는?”으로 시작된 질문에 여러 대답이 나왔지만, 그다지 만족스러워하지 않으셨다.

결국 질문은 “자연수는 뭘까?” 까지 내려왔다. 재료공학과로 물리학을 부전공 하던 필자는 “1과 1의 합이요.” 손을 번쩍 들고 말씀드렸는데 의외로 괜찮은 정의라고 짧게 말씀해 주셨다.

칭찬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그 짧은 순간이 그 후 평생을 이런저런 정의와 이유에 골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OEIC(Opto-Electronic Integrated Circuit)에 대해 두 시간 반 교수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눈 것과 지나며 인사를 드린 게 전부였는데도 오랫동안 마음 속 뿅망치를 들고 계신 스승님으로 기억되는 분 중 하나다.

옥스포드 사전을 보면 공학은 ‘공업적인 생산에 응용하여 생산력과 생산품의 성능을 향상·발전시키기 위한 과학 기술의 체계적인 학문. 엔지니어링(engineering).’이라고 정의된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면 다른 학문체계를 정의할 때 또 다른 정의를 정립해야 한다.

좀 더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필자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선을 붙들고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넓혀 가는 학문’을 공학으로 본다. 기계공학은 그 대상이 기계적인 분야여서 기계적인 부분에 의존하여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에 대하여 배우고, 화학공학은 화학적인 분야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학, 화학, 수학과 같은 순수학문 –이학-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를 만드는 진리에 대해 탐구한다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정의하고 있다.

같은 정의 방법을 인문학에 적용하면 인문학은 ‘해야 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의 경계에 대해 공부하고 해야 하는 일의 범위를 넓혀 가는 학문’이다. 철학은 해야 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의 경계를 제시하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예술은 ‘표현할 수 있는 것과 표현할 수 없는 것, 표현해야 하는 것과 표현하면 안 되는 것의 경계에 대해 궁구하고 표현해야 하는 것, 표현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넓혀가는 분야’라 생각한다. 예술에 동원되는 수단에 따라 시각적인 요소가 주된 것이면 미술로, 청각적인 요소가 주된 것이면 음악으로 구분된다.

스포츠를 예술의 일부로 보는 것은 사람의 몸을 통하여 건강함을 표현하는 분야이기 때문일 것이다. 흑돌과 백돌을 열아홉 줄 가로세로 격자점 위에 올려놓는 바둑이 왜 스포츠인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지만 이 기준을 사용하면 이해될 수 있다. 몸의 행위를 통하여 기세와 수세, 지혜의 건강함을 표현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BTS가 존경받는 이유도 잘 생겨서, 노래를 잘 해서, 칼 군무에 능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행위가 표현의 영역과 영향력의 경계를 확장했다고 세계인이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의학과 정치학 같은 분야는 인류가 만들어낸 고도로 발전된 응용학문 체계여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야 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들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어떤 의미에서든 고통의 총량을 줄이고 고통 없는 삶의 총량을 늘리는 방법에 대하여 궁구한다.

법학은 법체계로 해석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적용범위를 넓히고, 넓어진 적용범위가 범죄라고 불리는 촉법행위의 총량이 줄어드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인 것 같다.

감히 각각의 학문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전공분야만을 파고 드는 공학의 특성 상 어떻게든 이해의 폭을 넓혀 정리해 두려는 몸부림으로 봐주셨으면 한다.

공학도의 어림 반푼어치 없는 몸부림으로 이해하는 언론은 ‘매일 한정된 지면의 가치를 염두에 두고 보도해야 하는 진실과 미처 보도할 수 없는 진실의 경계에 대해 고민하고 사회가 인지하는 진실의 총량이 늘어나는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는 분야’이다.

질병관리청의 존재 이유는 앞의 여러 기준들과 비슷한 면이 있어 하루 최대 11만 건의 검사 가용한계와 한정된 병상 수를 염두에 두고 검사해야 할 사람과 검사할 필요가 없는 사람, 의료시설에 수용할 사람과 기다려도 되는 사람의 기준을 세워 질병 관련 조직이 정치적 컨트롤이나 개인적 감정이 아닌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도록 하는데 있다.

만일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전 세계가 지켜보는 우리나라의 검사, 확진자 수는 일부분의 데이터로 전체 데이터를 검증하는 과학인 통계학의 정규 패턴에서 벗어나 이미 세계적인 망신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누구나 찾아서 확인할 수 있고 이해하기 쉬운 자연수로만 된 검사자 수, 확진자 수, 사망자 수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최전방 군인 같은 분들이 있는데, ‘코로나 19의 치명률은 독감과 다를 바 없다’, ’검사 결과는 조작되고 있다.’, ‘백신을 맞으면 노예가 된다’, ‘(존재하지도 않는) DNA 백신은 추천하지 않는다’ 등의 과학적 근거가 없는 누군가의 상상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생산되고 회자되면서 생명력을 얻는 현실이 안타깝다.

코로나19 판데믹 사태가 종말을 알리는 올 여름이 지나면 일상을 회복한 국민들이 깨어나 권력을 가진 법 집행기관, 언론, 종교 지도자들이 양심에 더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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