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실패.., 곧 국가의 실패입니다 - 15

▲ 사진=조광한 경기도 남양주 시장

아돌프 히틀러는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6000만 명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광기와 집착으로 전 세계는 끔찍한 재앙을겪어야만 했습니다.

히틀러는 1889년 독일 국경부근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1905년 실업학교를 중퇴하고 미술대학에 지원했지만 재능을 인정받지 못해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18세에는 어머니를 잃고 물려받은 약간의 유산과 그림엽서 등을 팔면서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활했습니다.

이시절 도서관에서 독학을 했는데, 인종 우열이론과 반유대주의 정치사상이 형성됩니다.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증오하게 되고 독일민족 우월주의를 신봉하게 됩니다.

1913년 오스트리아 병역을 기피해 독일 뮌헨으로 도피후 체포됐지만 신체검사 부적격으로 병역이 면제됩니다. 그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민족 우월주의와 애국심에 열광했던 히틀러는 독일군에 지원 입대하고 무공을 세워 1급 철십자훈장을 받게 됩니다.

히틀러의 운명은 이일을 계기로 완전히 달라집니다.군에 복무하던 1919년 9월,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반민주, 반유대주의 군소정당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당의 모임에 갔다가,얼떨결에 독일 우월주의를 연설하게 됩니다. 그 연설에 감동을 받은 당수의 권유로 입당하며 정치를 시작하게 되고,1920년 4월 제대 후부터는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는 당명을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로 바꾸어 그 유명한 나치(Nazi)로 불렸고 1921년 7월, 당내 투표에서 단 1표 차이로 당수에 올랐습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의 결과물인 베르사유조약 타파, 위대한 독일 재건, 민주정당 타도, 독재 강행, 유대인 배척 등을 주장하며 조금씩 당세를 넓혔습니다. 

베르사유조약은 1차 세계대전 후 승전한 연합국과 패전국 독일이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에서 체결한 조약입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가혹한 대가를 치렀는데, 점령지와 프랑스 접경지를 이양해 영토의 13%를 잃었습니다.

또 징병제 폐지, 육군 10만 명 제한, 군용기와 잠수함 해체, 군수공장 폐쇄,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배상금 지불을 위해 화폐를 무제한으로 찍어내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져 독일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1923년 히틀러는 뮌헨의 맥주홀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곧 진압되고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의 분위기는 히틀러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재판에서 연설에 가까운 히틀러의 진술에 “순수한 애국심과 고귀한 의지로 가득 찼다.”는 평가를 받았고, 반역죄인데도 고작 5년 형을 받고 9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납니다.

히틀러는 쿠데타의 실패를 통해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쿠데타가 아니라 전폭적인 대중의 지지, 즉 선거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후 그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연설과 선거 운동에 더욱 몰두하게 됩니다.

나치스의 초기 당세는 미약했고 1928년 총선에서 2.6% 지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9년 경제대공황이 발생하자 히틀러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실업률 33%, 실업자 6백만 명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허덕인 국민들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실망했고 절망은 극에 달했습니다. 수레에 지폐를 가득 싣고 가야 감자 1kg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혼란과 절망 속에서 히틀러의 ‘위대한 독일 재건’과 ‘민주주의 철폐와 강력한 리더십의 독재’ 주장은 힘을 받고 지지를 얻어 약 2년 만인 1930년 9월, 18.3%의 지지로 급격히 상승해 나치당은 2당으로 도약합니다.

히틀러에게는 천부적으로 뛰어난 연설의 재능이 있었습니다. 청중을 압도하는 연설과 선전능력으로 지지를 얻었습니다.그의 선동적인 연설은 혼란과 고통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속 시원하고 후련한 착시효과를 주게됩니다.

연설의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오페라 가수에게 연기수업을 받으며 제스처와 표정, 목소리 등을 연구했고, 감성이 살아나는 일몰시간에 해를 등지고 높은 연단에서 연설하는 등 시각적 연출을 치밀하게 계산한 연설을 했습니다.

히틀러는 2당에 오른 2년 후인 1932년 4월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36.8%로 2위를 기록했습니다.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이 37.3%를 획득해 1당에 오르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3년 1월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합니다.

총리가 된 직후인 3월, 반대파를 탄압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한후 총선을 치러 나치당은 43.9%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 해,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의회의 전권을 나치당에 위임하는 선거를 치러 92.1%의 압도적 득표로 일당독재를 확립합니다.

이듬해, 80세 고령의 대통령이 갑자기 사망하자 1934년 8월, 총리와 대통령을 겸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88.1%의 찬성으로 히틀러는 마침내 총통에 취임했습니다.

히틀러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총통에 오른 ‘선출된 권력’이었고 대중 민주주의가 낳은 재앙입니다.

다음에는 반대파를 철저하게 탄압 숙청하며 만들어낸 히틀러의 독재화 과정과 2차 세계대전을 살펴보겠습니다.

*기고는 본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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