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국가… 멈춰버린 국가=4

▲ 사진=조광한 경기도 남양주시장
조광한 입니다. 네덜란드의 청어 산업과 농업 혁명에 따른 수출과 무역의 발달은 조선업과 해상운송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선업과 해운업은 네덜란드 황금기를 이끈 쌍두마차였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유대인과 개신교도들의 이주와 함께 유입된 선박건조기술을 활용해, 근대초기 조선업 분야에서 유럽 해상운송의 혁명이라 일컬어질 만한 눈부신 발전을 만들어 냈습니다.

1595년, 한 조선업자가 ‘플류트(fluit)’라는 파격적인 범선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조금씩 더 효율적으로 개조되었고 17세기 초반 기본 틀이 완성되었습니다. 플류트선은 역사상 최초의 화물전용 운반선인데, 이 배로 유럽의 해운업을 장악해 네덜란드인들은 ‘바다의 마부’라고 불렸습니다. 플류트선은 가볍고, 빠르고, 적은 선원으로 운항이 가능해 운송비용이 매우 저렴했습니다.

풀류트선이 만들어진 계기는 조금 독특합니다. 당시 서유럽 국가들은 발트해 무역의 의존도가 높았고, 덴마크의 외레쥰드(Oresund) 해협을 반드시 지나야 했습니다. 발트해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가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럽 본토에 둘러싸인 바다입니다.

덴마크는 해협을 지나는 선박에게 통행료를 징수했는데 통행료의 산정방식은 갑판의 너비였고, 갑판이 좁을수록 통행료를 적게 냈습니다. 새로운 배를 개발한 목적은 단 하나, 갑판은 좁고 아랫부분의 선창 즉 짐칸이 넓은 상선을 만들어 세금을 적게 내고 화물을 최대한 많이 실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목적에 맞게 플류트선은 윗부분인 갑판은 좁고 아랫부분인 선창은 넓어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짐칸이 있는 아랫부분이 둥글게 튀어나와 뚱보선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선체가 길고 중량이 매우 가벼웠고, 속력은 기존 선박의 약 2배로 상당히 빨랐습니다. 또, 과학적인 돛의 배치로 선원이 기존의 반 이상으로 줄었습니다. 1620년 영국의 200톤급 선박에는 최소 30명의 선원이 필요했지만 플류트선은 9~10명의 선원으로 운항했습니다.

게다가 건조비용도 적었습니다. 이주민들이 가져온 최신기술 덕분에 다른 나라보다 싸게 만들 수 있었는데 영국에서 1300파운드가 든다면 네덜란드는 800파운드에 만들어 3분의 1에서 절반 가까이나 저렴했습니다.

네덜란드의 해상무역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경제적인 상선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플류트선은 이런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했습니다. 조선업으로 가장 유명했던 곳이 자르담인데 60여 개의 조선소가 성황을 이뤘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대제가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기 위해 황제의 신분을 숨기고 100여명의 사절단에 끼여 자르담의 한 조선소에서 목수로 일하며 선진 기술을 배운 일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이런 여러 장점 때문에 네덜란드의 화물 운송비는 경쟁국들의 3분의 1에 불과했고, 이것이 네덜란드가 세계의 해상운송을 평정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플류트선 상선들이 지중해와 아시아까지 진출해 교역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무역이 꽃피게 되었습니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 선박의 운송량은 영국, 독일, 프랑스를 합한 것보다 많았고, 세계 무역선의 총수가 약 2만 척이었을 때 네덜란드의 선박이 1만 5000척 이상이었습니다. 세계 무역의 75% 이상을 네덜란드인들이 장악한 겁니다.

네덜란드의 아시아 무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원양항해와 식민지 건설보다 거의 1세기 가량 늦었지만 발전 속도나 규모 면에서 두 나라를 훨씬 앞질렀습니다.

1595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거쳐 동쪽 아시아로 가는 동방 무역로 항해에 성공한 후 본국의 100배가 넘는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았고, 뉴질랜드를 발견하고, 인도양 태평양의 무수한 섬까지 도시를 건설하는 등왕성한 무역활동을 했습니다.

일본에도 진출했는데 일본은 기독교를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추진했지만 네덜란드는 기독교를 전파하지 않는 조건으로 교역을 했습니다. 일본은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고 불렀고, 난가쿠’ 즉 난학(蘭學)이라는 네덜란드 문화와 서양 문물을 흡수했습니다.

1653년 헨드릭 하멜은 일본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 서귀포에 표착했고, 이후 13년간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1666년 일본으로 탈출하고 1668년 네덜란드로 귀환해 ‘하멜 표류기’라고 이름 붙여진 보고서를 써서 서양에 조선을 알렸습니다.

서쪽으로는 스페인의 펠리페2세가 항로를 봉쇄해 아시아 무역보다는 활발하지 못했지만 아메리카에 뉴저지주 등을 식민지로 삼았고, 영국이 빼앗아 훗날 뉴욕으로 이름을 바꾼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이러한 해상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북아메리카, 브라질, 남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 대만, 일본 등 전 세계에서 설탕, 비단, 향신료 같은 사치품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였다가 다시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설탕은 엄청나게 비싼 고급 상품이었고 소금보다 비쌌습니다. 남부 네덜란드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즉 앤트워프에서 발달했던 설탕 정제 산업은 16세기 후반부터 많은 이주민들과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넘어왔습니다.

다이아몬드 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모든 다이아몬드는 인도에서 채굴되었고 유대인들이 보석으로 가공했는데..오래 전부터 대부업에 종사하며 담보물인 보석류를 세공하고 판매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스페인이 다이아몬드 산업의 중심이었지만, 유대인들이 추방되고 이주하면서 암스테르담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개방적 관용과 포용으로 시작되었고, 플류트선을 개발한 창조성으로 번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절정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성은 다시 제도의 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음에는 바로 그 제도의 혁명, 시장경제와 금융의 혁명을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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