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국가… 멈춰버린 국가=5

▲ 사진=조광한 경기도 남양주시장
네덜란드 황금기 마지막 편입니다. 금융혁명과 시장경제 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주하면서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유대인들이 가져온 것은 다이아몬드만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대부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금융업에도 정통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선진적인 금융기법이 네덜란드로 들어오면서 현대 자본주의 금융시스템의 기본 골격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아시아 무역을 위해 각각 동인도회사를 운영했는데 설립 시기는 영국이 1600년, 네덜란드는 2년 늦은 1602년입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근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한 ‘최초의 주식회사’라는 점에서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시아는 네덜란드 해외무역의 주요 무대였습니다. 동방무역 회사가 늘어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선단 간에 전쟁을 방불케 하는 마찰이 일어나는 등, 힘의 소모가 심해지자 서로 힘을 합해야 한다는 반성이 일어났습니다.

1602년, 의회 의장인 올덴 바르네벨트 주도로 전국적인 규모의 ‘연합 동인도회사’가 설립됩니다.높은 수익이 보장되는 아시아 무역에서 과도한 경쟁을 지양하고 지속적인 수익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방무역을 주도하는 회사들의 자본을 하나로 모아,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10배 넘는 거대자본을 형성했습니다. 투자자들 중 상당수는 과거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었고 결국 네덜란드의 동방무역 자금은 스페인에서 나온 셈이었습니다.

사업에 투자한 업자들은 ‘주식회사’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더 큰 자금을 모으기 위해 주식을 발행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유한회사로서 혈연 기업이 아닌 여러 사람의 자본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설립자가 사망해도 기업은 유지됐습니다. 이는 중대한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국가로부터 무역 독점권과 면세권을 부여받았고,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해외 식민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으며 식민지의 행정, 사법, 국방의 권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특권은 국가가 곧 동인도회사의 대주주였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를 통해 네덜란드는 세계제일의 무역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1609년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곳에서 주식을 현금으로 손쉽게 교환하게 되었습니다. 1000명 이상의 펀드매니저가 활동했고 선물거래나 옵션거래 같은 첨단 금융기법도 등장했습니다.

주식이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면서 동인도회사는 주식을 최대한 작은 단위로 나누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최대한의 자금을 끌어 모았습니다. 암스테르담 시장 집에서 일하는 하녀도 전 재산을 팔아 동인도회사에 투자했을 정도였습니다.

주식 전매로 주식 수는 유지되면서 주주만 바뀌는 오늘날의 주식 시장 형태도 나타났습니다. 주식시장과 이익 분배에만 관심을 가졌고,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가 뚜렷해졌습니다. 동인도 회사는 약 200년 동안 주식 제도를 기반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증권거래소가 설립 된 1609년, 은행도 설립되었습니다. 네덜란드 경제 제도 중 주식회사와 함께 가장 뛰어난 성과물 중 하나는 은행과 신용거래입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세계의 물류 중심지이자 중계 무역기지로 수백가지의 다양한 화폐가 유통되었기 때문에 화폐를 통일하기 위한 목적으로 근대적 중앙은행의 모태가 된 암스테르담 은행을 설립하게 됩니다.

영국보다 100여 년 빨리 설립된 암스테르담 은행은중앙은행 및 외환은행의 역할까지 담당했고, 기업에 막대한 투자금을 대출해주는 등 자본주의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신용’이라는 개념이 탄생했고 당시 전 유럽을 통틀어 신용대출 개념을 이해하고 실행한 것은 네덜란드 상인뿐입니다. 이는 네덜란드 경제 번영의 중요한 비결 중 하나입니다.

이자율은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3%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영국의 이자율은 약 2배였습니다. 암스테르담으로 전 세계의 자금이 몰려들며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 번영을 누릴 때, 네덜란드를 지배했던 스페인의 펠리페2세는 재정이 쪼들리며 해마다 40%의 이자를 지불했고, 4번이나 파산하며 채무지불정지를 선언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시장경제는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근대 초기에 가장 수준 높은 생산성과 조건을 갖춘 유럽 최초의 ‘선진국’ 모델이 되었습니다.

한편, 종교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로 이어져 문화와 예술도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렘브란트 같은 위대한 예술가와 철학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어떤 출판물도 용인되었기 때문에 인쇄소, 출판사, 서점이 즐비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유명한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30년 넘게 암스테르담에서 사상을 꽃피웠고, 또 다른 근대 철학의 아버지 스피노자는 “이 번영의 나라에는 귀족이 없으며, 어떠한 계급과 종교도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고 찬양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이었습니다.

19세기 들어서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식민지를 잃었지만, 2020년 국민총생산 세계 16위, 1인당 국민소득 5만 2300달러로 세계 9위의 선진국입니다. 경상도만한 작은 국토에 비하면 상당한 강소국이며 경제대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4차례에 걸쳐 네덜란드 황금기의 과정과 비결을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배워야할 키워드는 종교와 사상에 개방적인 관용과 포용, 척박한 환경을 극복한 강인한 의지, 그리고 플류트선과 주식회사 등을 만든 창의성과 진취성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는 강인한 의지로 선진국으로 올라섰고, 뛰어난 창의성으로 K-드라마, K-POP, BTS등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점들을 살려, 더욱 더 발전하고 성공하며 움직이는 국가로 세계에 우뚝 서야 하지 않을까요?

움직이는 국가 네덜란드는 오늘로 마무리하고, 다음에는 짧은 시간에 극적인 도약을 이룬 한 나라를 알아보겠습니다.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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