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국가.., 멈춰버린 국가..⑥

▲ 사진=조광한 경기도 남양주시장 시진=남양주시

유럽에 우리나라와 비슷한 나라가 있습니다. 강대국 옆에서 겪은 수난의 역사와 식민지의 한(恨), 분단의 아픔, 강렬한 민족정신, 노인을 공경하는 대가족 전통과 자녀교육열 등이 비슷합니다. 짧은 시간 내에 가난을 벗어나 선진국으로 올라선 강인한 의지와 역동성까지도 유사합니다.

영국 서쪽 바로 옆의 섬나라, 아일랜드입니다.

더군다나 아일랜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짧은 10~20년 사이에 유럽의 최빈국에서 최고수준의 부유한 나라로 탈바꿈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거지에서 갑부로, 멈춰있던 국가에서 움직이는 국가를 넘어 뛰어가는 국가가 되었다고 할 만큼 극적인 도약을 이뤄냈습니다.

움직이는 국가로 아일랜드를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볼 텐데, 오늘은 험난했던 독립의 역사와 19세기의 ‘감자 대기근’을 알아보겠습니다.

아일랜드는 우리가 잘 아는 흑맥주 기네스의 나라이며, 국민의 95%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아일랜드섬의 전체 면적은 남한의 약 82%인데, 영국령인 북부 아일랜드를 제외하면 독립국 아일랜드는 남한의 약 70%정도입니다.

12세기 말부터 무려 약 800년 동안 잉글랜드 즉 영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큰 저항이 없었지만 16세기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성공회가 분리되고, 잉글랜드가 식민통치를 강화하며 가톨릭을 버리고 성공회를 믿도록 강요하자 반발이 시작되며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1641년에 시작된 10년간의 폭동에서 잉글랜드 사령관 올리버 크롬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60만 명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아일랜드인들은 그를 미워합니다.

이후 잉글랜드는 식민지 탄압으로 가톨릭신자의 공직 진출을 제한했습니다. 17세기 말 인구의 대부분이 가톨릭신자였지만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의원 중에는 가톨릭신자가 한 명도 없는 상황이 지속됐습니다.

한편 1845년부터 1852년 사이, 약 7년간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이 발생하게 됩니다.

아일랜드는 1년에 200일 이상 비가 내려서 늪과 습지가 많아 농사에 부적합하고, 산성토양이라 작물이 잘 자라기 힘들어 늘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더구나 영국의 식민지배로 인해 잉글랜드인이나 성공회로 개종한 일부 지주층 외에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일랜드인들을 먹여 살린 것이 감자였습니다.

감자는 16세기 남미에서 유럽으로 들어왔는데 당시에는 개량 전이라 별 맛도 없고, 생김새가 마치 나병에 걸린 것 같다는 이유로 ‘악마의 작물’로 불렸습니다. 심지어 1630년 프랑스 의회는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며 재배를 금지했고, 꽃이 예뻐 관상용으로 키우거나 소량 재배된 감자는 사료로 쓰이며 사람은 거의 먹지 않았습니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수탈의 역사라고 할 만큼 소작농들은 밀과 호밀처럼 돈이되는 환금 작물들은 지주들에게 다 빼앗겼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텃밭에 감자를 심었습니다.

아일랜드인의 약 40%가 감자로 연명했는데 감자는 손이 많이 가지 않고 토양과 기후에 상관없이 빨리 잘 자라서구황작물로 제격이었습니다.

또한, 감자는 익히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있어서 밀보다 두배나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습니다.

일 년 내내 감자와, 버터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버터밀크를 먹고 살았는데 감자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성인 남성이 하루 최대 6.35kg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감자를 먹으며 식량문제를 해결했고, 인구는 크게 증가해 800만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1845년부터 감자 마름병, 감자 전염병으로 거의 유일한 식량인 감자가 전부 곰팡이가 피며 죽는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됐습니다. 7년 동안 110만 명이 굶어 죽었고, 100만 명 이상이 먹고 살기 위해 아메리카 등으로 이주해 갔습니다.

미국 제35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현직 조 바이든 대통령이 아일랜드인의 직계 후손입니다. 부계와 모계 혈통까지 합치면 10여 명의 대통령이 아일랜드계입니다. 미국의 아일랜드계 인구는 약 4천만 명으로 추산되고 영국, 호주, 캐나다 등에도 약 3천만명이 살고있습니다. 이들은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합니다.

대기근 전에 800만이 넘던 인구는 대기근 말기에 600만으로 급감해 약 4분의 1이 줄었습니다. 1900년대 중반까지 인구가 계속 줄어 약 3백만을 밑돌기도 했는데, 현재 인구는 약 500만으로 아직도 예전의 인구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대기근에도 영국인 지주들은 소작료를 강요해 영국으로 수출했고, 아일랜드를 합병해 한 나라라고 했던 영국 왕실에 도움을 청했지만 영국은 이를 거부하고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은 다른 나라의 식량 원조까지 제한했습니다. 이는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에 대해 한 맺힌 증오심을 키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감정은 우리와 일본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후 독립운동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17세기에 성공회 개신교도가 주로 이주한 북부 6개 주는 독립에 반대해 치열한 내전을 치렀습니다. 결국 북부는 영국령으로 분리되어 분단되었고, 남부 26개 주는 독립전쟁으로 1921년에 자치령, 1948년에 아일랜드(Ireland) 독립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에이레(Eire)라는 국명은 아일랜드 고유어인 게일릭어의 명칭입니다.

아일랜드는 독립한 이후에도 유럽의 최빈국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1987년을 기점으로 반전이 시작됐는데.. 아일랜드 경제개발의 과정은 다음번에 살펴보겠습니다.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