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국가.., 멈춰버린 국가=⑧

▲  조광한 경기도 남양주시장 사진= 남양주시청
▲ 조광한 경기도 남양주시장 사진= 남양주시청

움직이는 국가로 네덜란드와 아일랜드를 살펴봤고, 이번에는 멈춰버린 국가의 첫 번째 사례로 포르투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포르투갈은 처음으로 대항해 시대를 열고 식민지를 구축해 제국을 건설했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제국이 되었다가 쇠락한 과정을 두 차례로 나누어 살펴볼 텐데, 오늘은 먼저 식민지 구축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위치는 지중해 북부 이베리아반도의 서쪽 끝, 유럽의 변방입니다. 동쪽에는 스페인, 서쪽에는 광활한 대서양이 펼쳐져 있고 면적은 남한의 92%로 비슷합니다. 현재 인구는 천만 명이 조금 넘고 2021년 추정 1인당 GDP는 25,060달러로 세계 36위입니다. 세계적인 축구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선수의 나라입니다.

15세기 서유럽은 아시아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세계사의 중심으로 등장했는데, 신항로를 발견하고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로 진출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지역으로 활동 범위는 넓어졌고, 식민지를 구축하고 교역을 하면서 경제도 비약적으로 팽창하게 됩니다.

아메리카의 경우 예전에는 신대륙 ‘발견’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아메리카에도 이미 원주민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이라는 용어는 유럽인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용어라서 적절치 않고 신대륙 ‘진출’이 옳은 표현입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시아 항로에 대한 욕구가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마르코 폴로가 1269년부터 약 27년간 동양을 여행하고 원나라에서 관리를 지낸 체험담을 루스티첼로가 기록한 동방견문록, 중국에서 전해진 나침반, 대형선박의 건조 등으로 동방에 대한 호기심이 최고조에 달했고 탐험가들을 흥분시켰습니다.

또, 유럽인들은 향료, 비단, 귀금속 등 동방 산물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향료는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었고 생강, 고추, 후추, 감송향, 단향, 용연향, 장뇌, 고애, 실론 육계, 육두구, 정향 등이었습니다.

고기를 맛있게 요리할 수 있게 하는 향료는 모두 동방에서 왔는데 육로와 지중해의 여러 상인을 거쳐 와서 엄청나게 비싼 데다, 가격 폭등까지 겹치면서 향료 한 자루가 집 한 채 값을 웃돌기도 했습니다.

유럽인들은 동방을 문명이 발달하고 황금이 넘치는 낙원처럼 상상했었고, 또 향료를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가져오기 위해 바닷길을 개척하려 했습니다.

포르투갈은 1139년 왕국이 세워지고 1143년 교황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아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유럽의 서쪽 끝 변방이자, 무역의 중심인 지중해에서 멀리 떨어진 가난한 나라였고 토양도 척박해,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대서양으로 나섰습니다. 지리적으로 불리한 여건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1415년 남쪽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 최북단 모로코 세우타를 점령하여 포르투칼이 북아프리카에서세력을 확장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함대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여러 곳에 식민지를 넓혔는데, ‘대항해가’ 또는 ‘항해 왕자’로 불리는 엔리크 왕자가 이를 총지휘했습니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했습니다. 해안선이 남북이 아니라 동서로 뻗어있는 것을 깨닫고 아프리카의 끝임을 확신했습니다. 원래는 폭풍을 피해 상륙해 폭풍의 곶이라고 했는데 왕이 희망봉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인도에 갈 수 있는 희망을 발견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0년 후 1498년, 바스쿠 다가마는 희망봉을 지나 드디어 인도 서해안에 도착했습니다. 80여 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포르투갈이 인도 항로를 개척한 겁니다. 포르투갈은 당시 유럽의 거대한 대포를 배에 싣고 무력을 앞세워 정복과 무역을 감행했습니다.

포르투갈과 유럽의 국왕들은 영토가 커질수록 더 많은 부를 얻게 되고, 국내를 안정시키는 방편이기도 해서 영토 확장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귀족들과 상인들은 큰돈을 벌 수 있고, 백성들은 식민지에 자신의 땅을 가질 수 있어 온 나라가 똘똘 뭉쳐 식민지 확보에 몰두했습니다.

사실, 이보다 93년이나 앞서 중국 명나라는 1405년부1433년 사이 이슬람인 정화를 시켜 7차례 인도와 동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출항마다 2만 7천명, 260척의 대규모였고, 큰 배 60여 척의 배수량은 1,500톤에 달했습니다.

다가마가 인도를 오갔던 배는 50~120톤, 후에 콜럼버스가아메리카를 오갔던 배는 3척에서 17척, 150톤 내외, 인원은 90명에서 많을 때 1200~1500명이었으니 정화 선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강유람선이 150톤 정도 크기입니다.

그러나 명나라의 해양진출은 황제와 귀족의 일시적인 관심일 뿐 전 국가적인 체계적 지원은 없었고, 후에는 외국으로 나가는 것조차 금지시켰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중국의 상품은 대단한 인기였지만 중 은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서양 상품을 탐내지도 않았고 영토 확장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예일대의 폴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의 흥망사>에서 명나라가 바다를 포기한 것은 세계 패권을 유럽에 넘겨준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1500년에는 포르투갈 함대가 희망봉으로 가는 길에 폭풍을 피해 멀리 우회하다가 우연히 브라질을 발견했습니다. 1534년에 도시를 건설하고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동방 무역과, 아프리카 부족에게서 노예를 사들여 아메리카에 파는 인간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얻었습니다.

아프리카 서해안과 동해안, 인도 해안에서 동남아시아와 중국남부까지 수많은 무장 상업 거점과 군사기지를 세웠습니다. 인도양에는 항해허가제를 실시해 포르투갈 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지나게 하며 인도양 무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세계적인 경제, 정치, 군사 강국이 되었습니다.

1557년 중국 마카오에 도시를 건설했고, 1887년 식민지로 삼았다가 1999년에 반환했습니다. 1543년에는 일본에 포르투갈의 화승총이 전해졌고, 일본인들은 수백번 총기를 개량한 끝에 대량 생산 기술을 갖추었습니다.

16세기 후반에는 오다 누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주축으로 조총 등 신군사 기술을 받아 들여 일본을 통일하였고, 이 조총 기술은 1592년 조선을 침략하여 약 7년간 지속된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크게 고전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494년과 1529년 두 차례,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분할해 지배한다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조약에 다른 나라들의 동의는 없었고, 오히려 다른 나라들도 자극을 받고 세계 진출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포르투갈 제국은 16세기 중후반에 절정기를 누린 이후 점차 쇠락했는데.. 쇠락의 과정은 다음 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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