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국가, 멈춰버린 국가..⑫

▲사진=조광한 경기도 남양주시장 남양주 시청
▲사진=조광한 경기도 남양주시장 남양주 시청

이번에는 스페인의 식민지 정복활동 중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2가지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또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에르난 코르테스가멕시코를 정복한 것 입니다.1519년 8월 코르테스는 멕시코 동부 해안, 지금의 베라크루스에서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멕시코 중앙 고원으로 진격했습니다. 코르테스는 베라크루스를 떠나기 전,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모두 불태워 아스테카를 정복할 각오를 다졌습니다.

아스테카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호수로 둘러싸인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이었습니다. 호수 주변에 크고 작은 마을과 농장이 있었고, 호수 위에는 수많은 목선이 떠있었습니다. 각 지역마다 호수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고, 성안으로 물을 공급하는 관개시설도 있었습니다. 성안 곳곳에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었고 가장 큰 피라미드 옆에 왕궁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스테카왕국의 왕 몬테수마2세는 당근과 채찍을 통해 코르테스의 진격을 멈추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는 군대를 파견해 코르테스 군대의 진격을 막는 한편, 사신을 보내 금은보화로 그들을 회유하고 성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황금은 오히려 스페인 정복자들의 탐욕을 부채질했습니다. 정복자들이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한 후왕은 그들의 거처까지 마련해주었지만, 코르테스 일행은 황금에 눈이 멀어 성안에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결국 그들은 아스텍족들의 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게 되고 코르테스와 부하 몇몇은 간신히 도망을 쳤습니다.그리고 1년후, 코르테스는 대포를 동원해 다시 공격했고 1521년 4월 테노치티틀란은 결국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아스테카왕국은 새로운 왕 쿠아우테목의 지휘 아래 끝까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저항했습니다. 코르테스는 성안으로 들어가는 식수와 식량 보급을 차단했고 수많은 아스텍족들이 굶어 죽게됩니다.

1521년 8월, 정복자들은 아스테카왕국 최후의 방어선을 결국 무너뜨렸습니다.집집마다 거리마다 호수와 강가에 아스텍족의 시체가 가득했고 시체를 장작처럼 겹겹이 쌓아 놓기도 했습니다.

아스테카의 마지막 왕 쿠아우테목은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국왕의 위엄을 잃지 않았고, 결국 반역이라는 미명하에 처형됐습니다. 코르테스는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고 지금은 그곳에 멕시코시티가 세워져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를 정복한 것입니다. 피사로는 스페인 군인의 사생아로태어났습니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가축을 기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아메리카 원정대에 수차례 참여하며 잔인한 정복 경험을 쌓았습니다. 당시 남아메리카 원정대의 목표는 오로지 남미 최대의 인디언 왕국인 잉카제국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1532년 가을, 피사로는 보병 102명과 기병 62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잉카제국 북부의 중심도시 카하마르카를 총알 하나 쏘지 않고 점령하게 됩니다.

잉카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는 카하마르카 부근에 8만 대군을 주둔시키고 스페인군에 대한 보고를 받습니다. 정탐을 했던 병사는 스페인군이 소규모이며 먼 길을 오느라 지쳐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고 커다란 양을 타고 있다고 보고를 합니다.당시 아메리카에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말을 처음 본 병사는 커다란 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1월 16일, 보고를 받은 황제는 당시 전문 번역가가 없어 스페인군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제대로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소수의 수행원만을 거느리고 피사로를 만났습니다.

그 허술한 틈을 타 피사로는 황제를 사로 잡았고 그 기회를 이용해 황금을 가져오라고 협박을 합니다. 너비 7미터, 폭 5미터의 방에는 금을, 그보다 조금 작은 2개의 방에는 은을 가득 채우라고 종용했습니다.

원주민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전국에서 금은보화를 운반해왔고 이때 모인 황금이 6천kg, 백은은 1만2천kg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초 피사로는 금과 은을 가져오면 황제를 살려주겠다고 했고,황제의 처형에 반대하였지만 측근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일부다처제, 근친혼, 우상숭배 등 종교적인 이유를 내세워 결국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비기독교인인 황제가 화형이 아니라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사후에 본인의 군대와 함께 스페인군에 대항해 싸우겠다며 죽기 전에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를 잃은 잉카족들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고, 피사로는 단숨에 수도 쿠스코를 점령했습니다. 1533년 11월 인구 25만의 대도시 쿠스코는 2백 명도 안 되는 피사로군에게 허무하게 함락되었고 성안의 재물은 모두 정복자들에게 약탈당하게 됩니다.

잉카제국의 멸망과 함께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의 식민정복 활동을 막아낼 수 있는 세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아스텍과 잉카제국 정복 이후 스페인은 본격적으로 아메리카를 식민지화 했습니다. 초기 식민주의자들은 잔혹한 식민정책을 실시했고, 인디언들의 운명은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수많은 인디언들이 무자비하게 살육당하고 농장과 광산의 고된 노역으로 죽어갔습니다.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멕시코 인구는 2천5백만 명에서 백만 명대로 줄었습니다. 95%가 사라진 겁니다. 남미 전체는 1500년에 4천만 명에서 1650년에1천2백만 명으로 인구의 70%가 감소하게 됩니다.

이렇게 인구가 줄어들게 되는 또 다른 이유중 하나는 초기에는 스페인 약탈자들이 그래도 소수였지만, 정복이후 스페인 약탈자들이 남미 대륙 곳곳에 본격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 입니다. 그와함께 그들이 가져온 천연두,홍역,디프테리아 같은 전염병으로 아메리카 인디언은 거의 전멸하게 됩니다.

아메리카에는 유럽의 전염병이 없었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면역력이나 저항력이 거의 없었고,마을 전체가 전멸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인디언들의 비참한 삶을 슬퍼하고 구원하려던 사람도 있었는데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신부입니다.

스페인 왕이자 신성 로마제국 황제인 찰스5세는 1550년 바야돌리드의 산 그레고리오 수도원에서 인디언의 인권을 주제로 공식적인 토론을 주재하게 됩니다.

이때, 인디언에게 인권이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신부이고, 인디언은 철학적으로 덜 성숙된 인간이기 때문에 정복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맞선 사람이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 였습니다.

이 논쟁은 1550년 9월부터 1551년 5월까지 지속되었고 이 기간동안 영토확장은 중단되었지만 결국 인디언의 인권에 대해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인디언 대신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데려오는 것으로 논쟁을 매듭짓게 됩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신부는 당시 보기 드물게 정의감을 가지고 인디언들을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가 1567년에 출간한 ‘인디언 멸망에 대한 간단한 보고서’는 극악무도한 점령자들의 만행을 잘 보여줍니다.

보고서에는‘가톨릭 신자라는 군인들은 노인, 아이, 임신부를 가리지 않고 칼로 찔러 죽이고 토막을 내고, 누가 더 정확히 반 토막을 내는지 누가 한칼에 더 많은 인디언을 죽이는지를 놀이로 삼았다.어린 아이를 바위에 내던지고, 엄마와 아기를 한 칼에 베어버리고, 산 채로 불에 태우고, 도망치다 붙잡히면 양손을 자르고, 산 속으로 도망치면 맹수 같은 사냥개를 풀어 잡히는 대로 갈기갈기 물어뜯어 죽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스페인..해가지지 않는 최초의 강대국이 된 배경에는 원주민 인디언의 엄청난 고통과 잔인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다음번에는 스페인 제국이 기울게 되고, 멈춰버린 국가가 되는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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