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국가,멈춰버린 국가..⑭

▲조광한 경기도 남양주시장 사진=남양주시청
▲조광한 경기도 남양주시장 사진=남양주시청

[일간투데이]역사상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던 스페인은 급속히 기울고 쇠락하고 말았는데 오늘은 그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556년에서 1598년까지 약 43년을 재위한 국왕 펠리페2세 때 스페인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 말기에 이미 스페인의 황금시대는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포르투갈도 그랬듯이 스페인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국력을 소모했습니다.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스페인은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동시에 여러 지역에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아메리카와 필리핀 등의 식민지에서도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지만 정말 중요한 전쟁이 유럽 본토에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영국과의 패권 전쟁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국가와의 종교전쟁, 그리고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이슬람 국가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 등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전쟁이 계속되면서 스페인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고 전 왕인 카를5세부터 이어진 재정 압박으로 펠리페2세는 4번이나 파산을 선언했습니다. 승리한 전쟁도 있었지만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하는 패배가 더 많았습니다. 이러한 전쟁으로 스페인 제국은 쇠락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한 사건은 스페인으로서는 뼈아픈 것이었습니다. 해외무역에서 영국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자 펠리페2세는 영국을 정벌하기 위해 대함대를 편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무적함대입니다.

전함 127척, 수병 8천 명, 육군 1만9천 명, 대포 2천 대를 가지고 1588년 5월 28일 포르투갈의 리스본 항을 떠나 네덜란드 육군 1만8천 명과 합류해 영국에 상륙할 계획이었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한 강대국 스페인과 당시 작은 섬나라이자 2등 국가인 영국의 전쟁이었고, 더구나 병력이나 전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스페인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세는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한 전함 80척과 기동력이 뛰어나고 잘 훈련된 8천 명의 병사들로 무적함대와 싸우게 했습니다.

무적함대는 3차례의 해전으로 1만4천 명의 병사와 선원이 사망하는 등 심각한 타격을 받은 와중에 폭풍을 만나 반 이상의 전함을 잃고 54척만이 스페인으로 돌아왔습니다. 전투로 잃은 전함은 3척에 불과했습니다. 펠리페2세는 “내가 영국과 싸우라고 했지,태풍과 싸우라고 했던가?”라면서 탄식했습니다. 반면, 영국의 손실은 배 7척, 사망 100여명에 그쳤습니다.

영국이 무적함대를 격파한 이 전투는’칼레해전'으로 불리며 '살라미스 해전', '트라팔가 해전'과 함께 세계 3대 해전으로 손꼽힙니다.

'칼레해전'으로 스페인은 패권이 쇠퇴하는 반면 영국은 해상 무역에 진출하며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앞서 네덜란드 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은 종교 문제를 잘못 처리하면서 커다란 국력의 손실을 자초했습니다.

1492년 국토수복전쟁인 레콩키스타를 마무리한 직후 유대인 추방령인 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신성한 가톨릭 교리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며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강제로 추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대부분 경제 발전을 이끄는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이들이 스페인에서 쫓겨난 후 스페인령으로 이동의 자유가 허가 되었던 네덜란드로 이주하면서 스페인은 쇠퇴하고 네덜란드는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국왕들은 가톨릭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해왔고 이는 펠리페2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스페인에 남아있던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인 무어인을 이교도로 간주하여 탄압하고 강제로 추방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무고한 부녀자들을 탄압하여 목숨을 잃게 했습니다.

이렇게 상공업 분야에 주로 종사하던 유대인과 무어인까지 대거 추방하자 스페인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졌습니다.

게다가, 금융이나 세금관리 등 국가재정 운영을 위한 행정 전문 인력이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추방은 행정적인 기반과 인프라가 부족했던 스페인의 국가재정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결국 왕실재정 파탄으로 쇠락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막대한 금은보화는 역설적으로 사회 전체에 부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스페인제국이 쇠퇴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과도한 골드러시로 수공업과 농업 등 일상용품을 생산하는 노동을 천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농업이나 수공업은 하층민이나 이민족들이 하는 천한 일이라고 여기게 됐고, 이러한 분위기는 농업 및 수공업이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1598년부터 1602년까지 이어진 페스트 전염병으로 중부지방에서만 5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7세기 전반에 소빙하기라고 불릴 정도로 좋지 않은 기후로 흉작이 이어지면서 1598년 대략 830만 명이던 중부 카스티야 지방의 인구가 17세기 후반에 약 660만 명으로 20%가 감소했습니다.

1609년에는 펠리페3세가 가톨릭교도 중에서도 조상이 이슬람교를 믿었던 이들을 추방했는데, 지중해의 해적들이 이들과 밀통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들 또한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고 약 30만 명이 추방되며 경제의 활력은 더욱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왕과 귀족들은 사치를 일삼았고, 경제가 침체하며 세수가 크게 줄자 손쉬운 방법으로 대규모로 돈을 찍어냈습니다. 금화를 대신해 가치가 낮은 구리로 값싸게 동전을 대량으로 만들자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플레이션의 개념과 영향력 자체를 몰랐습니다. 물가는 폭등하고 국민의 생활은 더욱 열악해졌습니다.

왕실은 세수 확보를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며 원주민의 고혈을 짜냈고, 여러 관직을 돈을 받고 팔아 20만 개의 관직이 스페인 사람들과 여러 유럽 사람들에게 매매되었습니다.

결국 펠리페4세는 파산을 선언했고, 그의 재위 때인 1640년에 포르투갈이, 1648년에 네덜란드가 독립했습니다. 1659년에는 약 25년간 지속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피레네 산맥을 국경으로 한다는 조약에 서명하면서 그 동쪽 땅을 잃었습니다. 사실상 유럽의 패권을 상실하고 변방의 나라로 되돌아간 겁니다.

16세기 유럽의 최강대국에서 변방의 국가로 쇠퇴한 스페인을 보면, 나라를 부흥시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부흥한 나라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도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합니다.

결국, 전에 말씀드린적 있습니다 만포용적국가는 성장하지만.. 착취적국가는 실패한다는 소중한 사례입니다. 다음에는 움직이는 국가로 스웨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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