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10년 넘게 도시계획과장 맡아

많은 사람이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전후에 곧바로 도시계획을 세워 재건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지금의 소득 수준에서나 가능한 주장일 뿐이다. 전쟁 직후 1953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으며. 대다수 서울 시민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한때 동료였던 박유서(한국전쟁 당시 서울특별시 공보계장)는 “예산도 부족한 정부가 서울 재건을 위해 사유재산을 몰수해가며 도시계획을 세울 수는 없었다. 전쟁에 시달린 시민이 하는 일을 조금씩 도와줘 그들이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게 정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회고했다.

한국전쟁 뒤 서울의 재건 과정은 서울의 도시계획사를 연구하는 내게 중요사안이었다. 이와 관련된 자료와 증언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장훈’이란 사람이 1945년 9월 17일부터 56년 4월 9일까지 10여년간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맡았다는 것이다. 수소문 끝에 그의 집을 찾아 그를 만났다. 나는 지금도 오만불손하고 건방지다는 말을 듣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이러니 젊었을 때는 더 했을 것이다. 20년 가까이 중앙도시계획위원을 지내면서 많은 도시계획안을 심의했다. 민간업체 관계자들이 심의장에 나와 도시계획 재정비 용역안을 설명하면 위원들이 질문을 퍼부었다. 나는 그 때마다 앞장서 큰소리쳤다.

용역업체 대표는 ‘업자’라는 입장 때문인지 나의 무례에 가까운 질문 공세에도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곤 했다. 동아기술단도 그런 용역업체의 하나였다. 선비 풍모의 동아기술단 대표는 나의 무례함에도 늘 미소를 띠곤 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집에서 나를 맞이하는 장훈씨가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나는 지난날의 무례함이 생각나 구멍이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고요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1911년 함남 북청에서 태어난 장훈씨는 서울에서 휘문중을 다니다 일본 와세다대 부속 공과학교 토목과에서 1년간 공부한 뒤 서울로 돌아와 소화공과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황해도청 내무부 토목과 조수로 3년간 일한 다음 38년부터 경성부 시가지계획과 조수로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도시계획 분야의 이론과 실무에 모두 밝은 그가 미 군정 초기 경성부의 초대 도시계획과장이 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서울의 도시계획에서 일제 유산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일제 말기에 거의 마무리된 영등포.돈암.대현지구 등 세곳의 구획정리사업이 대표적이다.

장훈씨는 서울 도시계획과장을 맡자마자 대방.한남.사근.용두.청량리.신당.공덕지구 등 모두 7개 지구의 약 2백62만평에 대한 구획정리사업을 시작, 50년 6월 끝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피란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51년 5월부터 엄청난 전후 복구계획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