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반장

우리집 3남매는 나이 차가 많다. 큰 딸은 둘째 딸과 5살, 막내 아들과는 11살이나 터울이 진다. 그래선지 어려서부터 그들간의 '위계질서'는 확실했다. 자라면서도 이같은 구도는 바뀌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간혹 "영원한 군기반장인 큰 딸이 있어서 참 많이 든든하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명절이 되면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을 찾아뵙기 위해 평소 아침보다 일찍부터 서둘러야 하게 마련이다. 이런 날에 우리집 기상을 책임지는 일등공신은 당연히 큰 딸이다. 아내와 내가 방문을 빼꼼히 열고 둘째와 막내를 깨워도 "알았다"거나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라며 뭉기적거리기 일쑤다. 이럴 때 큰 딸이 나서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빨랑 일어나"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꾸역꾸역 움직인다. 아무리 봐도 신통한 현상이다. 부모에게는 어깃장을 놓아도 큰 딸에게는 그런 법이 없으니.

막내는 올해로 대학 3학년이 됐다. 제 누나들을 내려다 볼 정도로 키도 컸다. 하지만 워낙 순둥이인데다 운동도 싫어해 짖궂은 행동은 딱 질색인 안방 샌님 수준이다. 그런데도 꼴에 사내라고 바로 위의 누나에게는 슬슬 장난을 치거나 농짓거리도 한다. 하지만 대장 누나에게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인지 '걸핏하면 아들이 제 누나와 언성을 높여 싸우거나 드잡이질에 가까운 몸싸움을 해서 머리가 아프다'는 다른 집의 푸념을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내가 남자형제만 셋이었던 집안에서 자란 탓에 더 그런 모양이다.

둘째와 막내는 초중고 시절에 학교나 학급에서 감투를 쓰거나 하는 것을 싫어했다. 어쩌다 떠밀리듯 직책을 맡게 되면 '공연히 힘만 들게 됐다'며 반갑지 않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반면 활달한 큰 딸은 초·중·고는 물론 대학에서도 간부직을 맡았다. 스스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쟁취(?)하기 위한 과정을 거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이렇게 셋의 성격이 달랐던 탓인지 집안의 리더는 언제나 큰 딸이었다.

동생들이 집에 있을 경우 큰 딸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라면 먹자"고 한다. 돌려 말할 것도 없이 '(네가) 끓여 달라'는 얘기다. 희한한 것은 별 군말도 없이 이를 따른다는 점이다. 아빠가 "너희들 먹을 때 내 것도 부탁해"하면 대개 귓등으로 흘려듣고 마는 놈들인데 말이다.

결혼한 이후에도 큰 딸은 여전히 '원격조종이 가능한 군기반장'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밖에서 밥이나 먹자"고 하면 동생들은 당연하다는 듯 발길을 약속한 장소로 옮긴다. 어째서 그런 현상이 가능한지는 우리 부부가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수수께끼로 남을 듯 하다. 천금을 주고도 못사는 것 중의 하나가 형제간의 우애일 것이다. 아무려나 3남매의 돈독함이 그들의 생이 마감될 때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서로 아끼고 보듬으며 잘 지낸다면 가능할 듯도 한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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