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밥



문정희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1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출처 :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2004)


▶사람들은 대부분 몸이나 마음이 몹시 아프고 지쳤을 때면 자연스레 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하느님이나 부처님도 계시고 아버지도 계시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외침은 대개 ‘엄마, 어머니’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 때문이 아닐까? '여자는 아기를 낳을 때 피를 흘리지만 출산은 본격적인 출혈의 시작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어머니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역설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것은 값지고 보람찬 고통이다. 그렇기에 죽기까지 그 모든 고통을 기꺼이 ‘혼자’ 감내한다. 가족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 찬밥을 먹던 사람', 그러면서도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가 간절히 그리워지는 건 내가 ‘찬밥’ 신세가 되었다는 증거다. 내가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어 고통을 감내할 때가 되었다는 얘기다. 생활상이 드러나는 일상적 시어의 사용과 시종 ‘찬밥’과 '따스한 사랑' '아픈 나'와 ‘그녀’를 대비 교차시킴으로써 개인적인 특수성을 모성이라는 보편성으로 확대한 시상의 전개가 진지하면서도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문정희(문정희)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서울여자대학교 현대문학박사.
△1969년 '월간문학'에 '불면' '하늘' 당선으로 등단.
△제8회 목월문학상, 제47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학부문, 제10회 육사시문학상, 제16회 정지용문학상, △제11회 소월시문학상, 제21회 현대문학상 수상.
△동국대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40대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현재 동국대 문예창작학부 석좌교수
△시집 : '꽃숨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아우내의 새' '찔레'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꿈꾸는 눈썹' '제 몸속의 새를 꺼내주세요'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카르마의 바다' '다산의 처녀' '응' '나는 문이다' '지금 그립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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