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종길

성탄제聖誕祭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출처 : 시집 '솔개' 시인생각(20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신약, 요한1:14), 강생(降生) 또는 육화(肉化, incarnation)는 성탄의 신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강생을 통해 ‘말씀’이라는 추상적 존재는 ‘예수’라는 구체적 존재로 육화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해마다 그것을 성탄절로 기념한다. 그것은 어쩌면 시에 있어서의 구체적 형상화와 닮아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부성애(父性愛)라고 하는 추상적 관념을 시적 표현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고 있다. 더군다나 시에 나타난 아버지의 이미지가 엄격하고 권위적이며 멀기만 한 게 아니라 자상하고 헌신적이며 친근한 모습으로, 성탄제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와 닮아있다 데에서 시의 형상화는 빛을 발한다. ‘서른 살’ 예수와 아버지와 나, 우리들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체험되고 표현될 때 그것은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되므로 매순간 성탄제에 다름 아니게 된다. 우리의 몸-마음에 사랑이 내리던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 모른다.”

■김종길(金宗吉)
△1926년 경북 안동 출생, 2017년 영면.
△고려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문門' 입선.
△1940년 '은하대', 1945년 '은화식물' 동인.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및 문과대학장, 제26대 한국시인협회장,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육사기념사업회장 등 역임.
△1996년 인촌상, 은관문화훈장, 예술원상, 고산문학대상, 만해대상, 제1회 이설주문학상 수상.

△시집 : '성탄제(聖誕祭)' '황사현상' '천지현황(天地玄黃)' '달맞이꽃' '해가 많이 짧아졌다' '해거름 이삭줍기' '그것들' '거짓말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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