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출처 : '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 문학사상사(2007)

▲가정은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근원, “가정이야말로 우리가 시작하는 곳!(Home is where we start from!)”이다. 소아과 의사이며 정신분석가인 위니캇은 이렇게 건강하고 창조적인 인격의 발달을 위해서 안전하고 촉진적인 가정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가정에는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과 돌보아주는 부모가 있다. 이 당연한 사실이 왜 이렇게 새삼스러운 것일까? 시인은 가정을 ‘신발들’이 있는 곳으로 표현한다. 신발은 ‘지상’의 길을 걸어야 하는 존재의 상징인 셈이다. 거기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돌아오시는 “십구문반의 신발”인 ‘아버지’가 계시고, 그 안에는 자녀들인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들”이 안전하게 놓여있다. 여기에서의 아버지는 하늘에 존재하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완벽하고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십구문반’의 “지상에 존재하는 어설픈 것”인 그가 위대한 것은 오직 그의 사랑 때문이다. 온종일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오셨으면서도 “육문삼의 코가 납작한 막내둥이”의 신발을 보고 ‘미소하는’ 아버지,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보호하고 양육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 일평생 “연민한 삶의 길”을 걸어오신 우리들의 ‘충분히 좋은(good-enough) 울타리(’벽‘)이시기 때문이다.

■박목월(朴木月, 본명 泳鐘)
△1916년 경상북도 월성(경주) 출생, 1978년 영면.
△대구 계성중학교 졸업.
△1939년 '문장'에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 '선그늘' 정지용 추천으로 등단.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한국시인협회 창립 및 회장, 조선문필가협회 및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심상' 발행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양대 문리대학장 역임.
△아시아 자유문학상,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시집 : '청록집'(조지훈·박두진 공저), '산도화' '난(蘭), 기타' '청담(晴曇)' '경상도의 가랑잎' '구름에 달 가듯이' '무순' '박목월 시선' '크고 부드러운 손' '소금이 빛나는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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