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수선화(水仙花)




김정희





한 점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에 냉철하고 영특함이 둘러있네  
매화가 높다지만 뜨락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서 참으로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푸른 바다 파란 하늘 한 송이 환한 얼굴  
신선의 인연 그득하여 끝내 아낌이 없네 
호미 끝으로 예사로이 베어 던져진 너를  
밝은 창 맑은 책상 사이에 두고 공양하노라



■출처 : '추사선생 시집 2', 서예문인화(2013)

▲“나는 평생 10개의 벼루에 밑창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옛 시를 소개한다. 수선화 철은 진즉 지났건만 필자가 엊그제 들른 찻집 앞마당에 핀 노란 수선화가 유난히 시선을 잡아끌어 이 시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때때로 사물을 통해서 자신의 내적 진실을 발견한다. 사물에 은유적 변형을 가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정서와 사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창작을 통해서 자기를 재확인하고 상처를 위로하거나 더욱 확신에 찬 행보를 계속할 힘을 얻게 되기도 한다. 이른바 창작의 자기치유와 성장의 힘이다. 동서고금의 많은 시인들이 오래전부터 그것을 알고 스스로 끊임없이 행해왔다. 이 시에서 추사는 ‘수선화’를 통해 그것을 펼쳐 보인다.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에 냉철하고 영특함이 둘러있”는 수선화는 추사가 생각하는 “해탈한 신선”과 같은 이상적 인간의 모습이다. 그는 평소 수선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들어 어쩌다 연경에 갔을 때나 볼 뿐이었다. 언젠가 연경을 다녀오는 사신이 아버지에게 선물한 수선화를 달라고 하여 고려청자 화분에 심어 존경하던 정약용 선생에게 선물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데 그 귀한 꽃이 유배지인 제주도의 대정에는 지천에 널려 있어 농부들이 “호미 끝으로 예사로이 베어 던져 버리는” 게 아닌가. 그걸 보면서 추사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 법하다. 뛰어난 문인 예술가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던 그로서는 그 귀한 꽃을 귀하게 대접하지 않고 베어 던지는 농부들이 마치 자신을 유배 보낸 조정의 인사들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베어진 꽃은 자신과 닮아보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를 “밝은 창 맑은 책상 사이에 두고 공양하기”로 한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시의 창작을 통해 긴 유배 생활의 고난 속에서도 추사체를 완성시킬 힘을 키워왔을지도 모른다.

■김정희(金正喜,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노과(老果) 등)
△1786년 충남 예산군 출생, 1856년 영면.
△1809년 생원시 장원급제, 1810년 자제군관으로 청나라에 따라가 옹방강, 완원에게 고증학 수학.
△1819년 식년시 병과 합격, 암행어사, 1827년 효명세자의 필선, 1835년 성균관 대사성 및 이조판서 역임.
△1840~48년 제주도로 유배, 1851~1852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67세 과지초당 만들어 후학 가르침.

△시집 : '국역완당전집 1, 2, 3, 4' '추사선생 시집 1,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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