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함동선

▲ 함동선 시인.
고향 떠날 때의
노 젓는 소리 생각하면
지금도 어지럼병이 도지는데
짐을 지워주시던 어머님의 그 따스한 손결은
이제쯤 파삭파삭한 가랑잎이 되었을 거야
보리밭이 곧 마당인 집에서
막둥이가 돌아오는 날까지
막둥이가 커가는 소리
밭이랑에 누워 듣겠다 하셨는데
지금은 손돌(孫乭)이바람만 서성거릴 거야
눈을 꿈쩍꿈쩍 거리다가
마흔다섯을 살아온 세월이
물속에 비친 등불처럼 흔들려오는
유리창에는
그물처럼 던져 있는
어머님 생각이
박살난 유리 조각으로 오글오글 모여든다


■출처 : 시선집 '마지막 본 얼굴', 홍익출판사(1987).

▲함동선 시인은 실향시인이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으로 38선 이남이었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이 되어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전쟁 당시 "잠깐일 게다"라며 잠시 피해 있다가 오라는 어머니만 남겨둔 채로 떠나온 고향을 시인은 시를 쓴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한 채 실향의 한을 곱씹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서 단순한 개인적 원한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인에게 어머니로 표상되는 고향은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루어 돌아가야 할 곳이며, 나아가 전쟁과 적대로 분열된 모든 인류가 회복해야 할 본향으로 확대 승화될 수 있다. 시인은 어머니가 6남매의 '막둥이'인 시인에게 그 "짐을 지워주"셨다고 느끼는 것 같다. 따라서 시인은 엄동에도 파랗게 돋아나는 "보리밭 밭이랑에 누워" "막동이가 돌아오는 날까지 / 막동이가 커가는 소리"를 듣겠다는 어머니의 당부를 아프게 되새기며, 이제껏 어머니의 당부를 들어드리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왔다는 데 대한 자책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귀향의 책무를 짊어지게 된 시인으로서는 어떻게든 그것을 건져내기 위해서 "어머님 생각"을 "그물처럼 던져" 놓지만 그것은 좌절만 안겨줄 뿐이다. "박살난 유리 조각으로 오글오글 모여든다"는 표현에서 그러한 시인의 치열한 내면의식을 엿볼 수 있다. 실향 1세대들이 거의 돌아가시게 된 지금, 시인이 감지한 분단과 실향의 '이 겨울'이 더욱 시리게 다가온다.

■함동선(咸東鮮, 호는 산목(散木))

△1930년 황해도 연백 출생.
△1958-1959년 '현대문학'에 '봄비' '불여귀(不如歸)' '학의 노래' 등 미당의 추천으로 등단.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과 졸업,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석사 및 박사 학위.
△'오시회(午詩會)' '시단' 동인, 월간 '학생예술' 편집장, 서라벌신문 주간 및 출판부장, 서라벌예술대학 및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동덕여자대학교 문창과, 제주대학교, 인천대학교, 경희대학교 국문과 강사 및 교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예술연구소 소장, 한국문인산악회 창립 및 초대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한국시문학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펜문학상, 국민훈장석류장,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서울시문화상, 청마문학상, 황해도 영예도민상 수상.
△시집 :'우후개화(雨後開花)' '꽃이 있던 자리' '안행(雁行)'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식민지' '산에 홀로 오르는 것은' '시간은 앉게 하고 마음은 서게 하고' '짧은 세월 긴 이야기' '인연설' '밤섬의 숲' '연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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