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정록

▲ 이정록 시인.
몽당연필처럼,
발로 쓰고 머리로 지운다.
면도칼쯤이야 피하지 않는다.

몽당(夢堂)의 생,
자투리에 끼운 볼펜대를 관(冠)이라 여긴다.
하얀 뼈로 세운 사리탑!
끝까지 흑심(黑心) 품고 산다.

한 사람의 손아귀,
그 작은 어둠을 적실 때까지,
검게 탄 맘의 뼈가 말문을 열 때까지.


■출처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창비(2016)

▲시인이란 무엇인가? 많은 시인들이 스스로 자문하곤 한다. 호라티우스는 "시인의 목적은 이익이나 교훈을 주는 일, 기쁨을 주는 일과 인생에 어떤 유익한 교훈을 결합하는 것."이라고 했는가 하면,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일 쓰는 일을 그만둘 경우에는 차라리 죽기라도 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그 대답이 그렇다고 하거나 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명확하고 확고한 대답을 내릴 수 있거든 시인이 되라"고 했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시인의 엄중한 책무나 운명 같은 것을 알려주는 말들로 시인으로서의 삶이란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게 해준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몽당연필'에 비유함으로써 그 치열하면서도 남루한 삶, 남루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리탑'처럼 명예로운 존재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발로 쓰고 머리로 지운다"거나 "면도칼쯤이야 피하지 않는다", "자투리로 끼운 볼펜대를 관이라 여긴다"는 구절들에서 삶에 밀착한 창작의 치열성과 시인으로서의 높은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시인은 '흑심'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자신의 '어둠'을 직시하면서 그 심연으로부터 빛의 '말문'을 열기 위해 '끝까지' 마음을 불태우는 사람이다. '몽당연필'처럼 짧지만 쓸 건 다 쓴, 작지만 힘 있는 시이며 시인이다.

■이정록
△1964년 충남 홍성군 출생.
△고려대학교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수료.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혈거시대(穴居時代)' 당선으로 등단.
△'비무장지대' 동인.
△현 천안중앙고등학교 교사.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박재삼문학상 수상.

△시집 :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의자'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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