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서정주

▲ 시인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출처 : '미당시전집 1' (민음사, 1994)

▲우리나라의 시 가운데 지극한 사랑의 시 셋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소월의 '진달래꽃'과 명월의 '동짓달 기나 긴 밤을', 그리고 미당의 '동천'을 꼽겠다. '진달래꽃'은 자신을 싫다고 하면서 떠나는 님을 고이 보낼 뿐 아니라 그 앞길에 꽃까지 뿌려 드리겠다고 하는 사랑의 마음씨가 일품이요, '동짓달'은 님이 계시지 않아서 더욱 길어진 상대적인 시간을 보존해 두었다가 절대적인 시간으로 누리겠다고 하는 사랑의 포부가 일품이다. 그리고 이 시 '동천'은 마음속에 연모하는 님을 위해 올리는 치성(致誠)이 하늘의 악마('매서운 새')도 감동케 한다는 사랑의 정성이 일품이라고 할 수 있다.

눈썹은 미의 상징으로, 예로부터 시인들은 미인의 눈썹을 아미(蛾眉)라고 하여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곤 하였다. 누에나방의 양 더듬이처럼 부드럽게 휜 모양이 마치 초승달을 닮았기에 그로부터 우리는 달 속에 산다는 전설의 선녀인 항아(姮娥)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도 된다. 이 시에서 '눈섭(눈썹)'은 '님'의 제유로써 시인의 "마음 속 우리님"이 시인으로선 감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너무도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님을 연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하면 천일 밤('즈믄밤') 동안이나 현실이 아닌 "꿈으로 / 맑게 씻어서", 지상이 아닌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놓았을까.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으니 하늘을 나는 '매서운 새'도 '그걸' 즉 나의 정성을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라고 하였다. 겨울밤 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과 때마침 그 앞을 날아가는 새의 풍경을 포착하여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겹쳐 놓으니 시인의 마음과 하늘이 하나인 듯 절묘하다.

서두에 언급한 사랑의 시 세 편의 공통점을 한 가지 더 들라면 짧다는 점이다. 매해 첫날이면 신춘문예 시 당선작들을 찾아 읽어보곤 한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길고 지리멸렬해지는 시들로 인해 마음이 어수선해지는 걸 느끼게 된다. 의식과잉과 의욕과잉의 시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하고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쓰므로 작가는 즐거울지 몰라도 독자는 괴롭다. 독자가 괴로운 시를 양산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에 필자부터 말과 글을 좀 줄이기로 했다.

■서정주(徐廷柱, 호: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북 고창 출생, 2000년 영면.
△중앙불교전문(동국대) 학사, 숙명여자대 명예박사.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 당선으로 등단.
△한국시사 명예회장,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 문인협회 회장, 현대시인협회 회장,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중앙대 문예창작 교수, 동국대 종신명예교수, 경기대 대학원 교수 역임.
△금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자유문학상, 5·16민족상, 동국문학상 수상.
△시집 : '화사집(花蛇集)' '귀촉도(歸蜀途)' '서정주시선' '신라초(新羅抄)' '동천(冬天)'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서으로 가는 달처럼…'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안 잊히는 일들' '노래' '팔할이 바람' '산시' '미당 서정주 시전집 1, 2' '늙은 떠돌이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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