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마경덕

▲ 마경덕 시인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출처 : '신발론' (문학의전당, 2013)

▲이 시는 사실을 뒤집어 표현함으로써 숨겨진 삶의 진실을 발견하게 하는 아이러니를 구사하고 있다. 또한 그것을 일기 형식에 담아 씀으로써 자아를 깊이 성찰하도록 해준다. 분주한 일과를 마치고 늦은 밤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쓸 때 우리는 느끼게 되리라. 가벼운 일상의 거죽 안에 얼마나 무거운 삶의 진실이 들어있는지, 자신만만한 인격의 가면 뒤에 얼마나 허약한 자아가 숨어있는지를.

여기에서 우리는 ‘신발론’으로 쓰인 시인의 ‘이력서(履歷書)’를 슬쩍 엿보게도 된다. 오늘 시인이 내다버린 신발들에는 그의 이력(履歷)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인은 “과적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배처럼 힘겹게 살아온 모양이다. 꽤 힘겨운 삶의 짐을 싣고 세상이라는 바다의 험한 “파도를 넘어온” 모양이다. 이제 그 ‘짐’은 지금이라는 항구에 부려져 있다.

세상 모든 일이 뒤집어 생각해보면 누구 또는 무언가의 희생 없이 지금 여기에 도달해 있는 건 없다. 나 혼자 모든 것을 다 해낸 것 같지만, 거기엔 언제나 내 존재의 무거운 짐을 감당해온 신발 같은 존재들이 있게 마련이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신발(배)’에 실려 어디로 끌려 다니게 될까. 문득 그것이 웬만해선 기울지 않는 신발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모두의 ‘나’라는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바다의 파도도 잠잠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본다. 그러면서 '나'라는 짐을 싣고 여기까지 온 모든 존재들에 감사드리게 된다.

시에 일기의 형식을 도입한 것과 함께 그 형태도 눈여겨볼만 하다. 치열한 사유의 여정을 보여주는 3연을 중심으로 1·2연과 4·5연이 가지런히 놓인 신발처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마경덕
△1954년 전남 여수 출생.
△여항실업고등학교 졸업.
△2000년 마로니에 주부백일장 시부문 준장원.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신발론' 당선으로 등단.
△현재 시마을문예대학, 한국시문화회관 부설 문예창작학교 강사, MBC롯데, AK문화아카데미 시 창작 강사.
△시집 : '신발론' '글러브 중독자' '사물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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