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적 공사관, '국가/공'을 위해 개인의 재산·생명 버려
당대 유명 철학자도 천황제·2차대전 가해 문제점 못 봐

▲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는 근대적인 의미의 일본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논리를 서양철학의 언어로 재구성하면서 동서양을 통합시킨 새로운 학문의 기초를 다졌고 교토대 철학과 제자들이 그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교토학파'라는 이름으로 확대되었다. 전 세계 유수의 종교 및 철학자들이 그의 사상을 여전히 연구하고 있을 만큼 정교하고 독창적이지만 그의 철학은 일본 제국주의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한계도 지닌다. 사진=게티 이미지(Getty Image)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지난 호에 보았지만 일본 최초의 성문헌법인 쇼토쿠 태자의 '십칠조헌법'(제15조)에서는 "사(私)를 등지고 공(公)을 향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다"고 규정하고 있다. 신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신분사회라면 당연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신도를 국가적 정책 속에 융합시켜 천황 중심의 '국체(國體)'를 확립시켜온 메이지 시대의 정책은 멸사봉공적 공공성을 잘 보여준다. 불교철학자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에 의하면 메이지 시대 이래 일본 국민에게는 국가라는 '오오야케'(公)를 위해 진력해야 하는 멸사봉공적 자세가 강력했던 탓에 2차세계대전까지 낳았다고 한다.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는 이렇게 말한다.

"'사'가 일본에서는 문지방 안의 자가(自家)의 세계(집·가정·자신)로서 그 영역을 인정받고 있었던 만큼 그것을 '없앤다'는 것은 '사'에게는 비극적인 일이었지만 국민은 '국가=공'을 위해 가족이라는 '사'의 영역을 버렸으며 자신의 재산과 생명이라는 '사'의 영역을 버리고 전쟁에 종사했다."

메이지 시대 이래 일본에서의 공(公)은 멸사(滅私)와 거의 동일한 가치를 지녀왔다는 것이다. 구사바 히로시(草場弘)의 '수험수신과강좌'(受驗修身課講座, 1938)에서는 1930년대 일본국민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나라의 국민정신을 파악하려고 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자기봉공(自己捧供)이라는 표현을 가지고서 그 뜻을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높이 있는 것, 공적인 것, 근본적인 것에 이 작은 내 한 몸을 온전히 바치는 정신이다. 봉공의 정신, 황운부익(皇運扶翼)의 정신, '사(私)를 뒤로 하고 공(公)으로 향하는' 정신, '자기 자신(私)을 움직여서 공(公)을 따라 죽는' 정신이다. '대군의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는 영광일지라' 하며 옛사람이 노래했던 바로 그 정신이다."

국가주의적 성향의 윤리학자 와쓰지 데쓰로우(和辻哲郞)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이런 식의 자세를 잘 볼 수 있다.

"공동체가 '사'의 초극에서 실현됨과 동시에 그 자체가 사적 성격을 띠는 것은 첫 단계일수록 현저하고 공동체가 커짐에 따라 희박해진다. 개인으로서의 인격은 일체의 사(私)를 버림으로써 성스러운 것으로서의 민족의 전체성에 귀일한다. '사'를 버리는 것[去]은 개성을 무시하는 것[沒]이 아니다. 정신공동체의 일원인 이상 인격은 어디까지나 개성적이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적인 것이 전일(全一)이 되는 것은 바로 '사'를 버리기 때문이다."

'전체'는 '사'를 버림으로써 성립된다. '활사(活私)'보다는 '멸사(滅私)'가 국가적 전체성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사상에서도 확인한 바 있듯이 국가를 최대의 영역으로, 천황을 최고의 지점으로 간주하던 일본의 공(公)은 사(私)적인 삶을 은폐시킴으로써만 드러나는 가치였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원리라는 것을 찾기 힘든 구조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당대의 수준급 사상가들에게서도 잘 볼 수 있다. 근대적인 의미의 일본 최초의 철학자라 할 만한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도 참혹한 전쟁까지 벌였던 일본 제국주의적 정책은 물론 그 정점에 있는 천황가를 긍정하거나 존중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도 일본적 공(公) 개념의 정점을 황실에서 찾았다. 황실과의 합일이 일본의 국체(國體)이라고 그는 말한다.

"황실은 과거·미래를 포함하는 절대 현재로서, 우리는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에서 활동하며 여기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때문에 아국에서는 제정일치라고 말하듯이 주권은 곧 종교적 성질을 갖는 것이다…거기에 아국체는 참으로 주체즉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 세계 창조란 것이 아국체의 본의(本意)이리라. 이 때문에 내부에 만민보익(萬民補益)이고 외부로 팔굉일우(八紘一宇)다. 이런 국체를 기초로 하여 세계 형성에 나서는 것이 아국민의 사명이어야만 한다."

"아국(我國)의 국체에서는 황실이 세계의 시작이고 끝이다. 황실이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고 절대 현재의 자기 한정으로서 모든 것이 황실을 중심으로서 생성 발전한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 국체의 정화(精華)인 것이다."

니시다는 그 논리적 명민함과는 어울리지 않게 서구를 향해 벌인 2차세계대전의 피해자인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일본인 전쟁 희생자만 의식한 모순적인 철학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가 파괴적 전쟁 자체를 찬양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세계 설명 이론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역사만을 긍정하는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이 제국주의적 야심을 가지고 합류한 2차대전과 그 정점에 있는 천황가를 칭송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당대의 사상가들은 전쟁의 희생자를 '영령'(英靈)으로 받듦으로써 계속 '영령'을 만들어내는 국가의 논리를 배후에서 뒷받침해 왔던 것이다. 일본 너머의 보편적 차원을 열지 못한 채 '멸사'를 최고의 덕목처럼 간주해온 국가지상주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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