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적 '공(公)'·사(私)', 천황 정점 상위자의 하위자 포섭 구조
국가 뛰어넘는 공적 관념 없어…국가 주도 침략전쟁 매몰

▲ 1958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에서 통용된 1만엔권 화폐. 쇼토쿠태자(聖德太子, 574~622) 초상이 새겨져 있다. 1930년에 100엔권 화폐에 등장한 이후 5000엔권을 거쳐 1만엔권에 이르기까지 쇼토쿠태자의 초상은 일본 화폐에 일곱 차례에 걸쳐 실렸다. 그만큼 일본 역사와 문화에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는 뜻이다. 쇼토쿠는 백제에서 전래된 불교적 가르침을 숭상하면서 일본적 정신의 근간인 '화(와·和)'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일본 최초로 성문헌법을 반포했다.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공과 사를 분명히 하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공과 사의 영역이 분명한 나라가 일본이다. 대외적으로 의사 표명을 해야 할 경우 공적 영역이 우선적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사'가 '공'을 그다지 침범하지 않는 까닭에 사회는 비교적 안정적이다.

물론 여느 나라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적 영역보다는 공적 영역의 힘이 셌다. 더욱이 수직적 신분 사회일수록 '사'라는 것은 없었거나 '공'에 종속적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역사 속에서도 확인된다.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는 일본과 중국 고전에서의 공(公)의 용례를 종합하며 이렇게 말한다.

"중국의 공(公)에는 공동체의 대표성이라는 의미와 함께 '천(天)'의 초월성을 기반으로 최고 권력자를 견제하거나 비판하는 상대화 가능성과 '평분'(平分·공평분배)이나 반(反)이기주의, 공평과 같은 도덕적 규범이 원리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그에 반해 일본의 '공(公·오오야케)·사(私·와다쿠시)'는 천황을 정점으로 그때그때의 상위자나 상위 영역이 하위자나 하위 영역을 포섭하는 구조를 띠고 있어서 천황과 일본이라는 틀을 뛰어넘어 이를 상대화할 수 있는 존재나 원리가 존재할 수 없다…그 바탕에는 최상위 영역인 천황과 국가가 모든 권위를 독점하고 그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식 및 정치의식이 있다."

요지인즉 기존의 공적 영역, 즉 천황 중심의 국가에 도전하며 그를 비판하는 상위의 영역은 없다는 것이다. 가령 일본 최초의 성문헌법인 쇼토쿠태자(聖德太子·574-622)의 '십칠조헌법'(제15조)에는 "사(私)를 등지고 공(公)을 향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 분위기는 지금도 웬만큼 유효해서 여전히 기존 국가론을 넘어서거나 전복시킬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공론화시키기 힘들다. 기존 국가론을 넘어서려면 사적 영역이 활성화되어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미조구치는 일본에서의 전통적 '사(私)'를 "지방 수장층의 오오야케적 질서 관념을 국가적으로 확대한 '공'에 포섭된 '사'"라고 규정한다. '공'에 종속되는 것을 전제로 존재하는 '사'라는 것이다.

'사'가 '공'에 종속적인 만큼 은밀함·개인적 내밀함 등은 보장받는다.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이 개인의 영역 안에 있으면 당연히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사'는 공의 하위 영역이라면 '공'은 '사'가 관여하기 힘든 '사' 밖의 영역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적 '공공성'이란 '사'의 자기 은폐를 통해 드러나고 또 드러내야 하는 세계이고 '사'는 그만큼 한정되고 감추어져야 하는 내밀한 영역이다.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의 글에서도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후쿠자와에 의하면 집의 문지방 안쪽이 '사'적인 것이라면 문밖으로 한 걸음 나간 세간의 일이 '공'이다. 그 '공'을 최대로 확대하면 국가가 되고 최고로 높이면 천황에까지 이른다. 그 이상의 공적 영역은 없다.

이때 '공'에 참가하고 협력하며 역할을 수행한다면 문지방 안쪽의 '사'는 간섭받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후쿠자와는 문지방의 안과 밖을 경계로 '공'과 '사'의 영역을 비교적 분명하게 구분한다.

물론 그 경계가 절대적으로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공'도 그보다 더 큰 영역에 대해서는 '사'가 된다. 공과 사는 영역과 범주에 따라 상대적이다. 다소 길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미조구치의 말을 인용해보자.

"예컨대 어느 교사에게는 자신이 속한 초등학교가 '공(오오야케)'의 장이 되지만 초등학교를 대표하는 교장에게는 그 외부의 마을이나 읍이 '공'이 되고 자신의 초등학교는 그에 반해 '사(와타쿠시)'영역이 된다. 또한 마을이나 읍에 대해서는 그 외부의 현(縣)이 '오오야케' 영역이 되고 그에 반해 자기 마을이나 읍은 '와타쿠시' 영역이 된다…만약 마을과 마을 사이의 다툼이 결말이 나지 않으면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마을을 넘어선 현(縣)의 '오오야케'의 입장일 것이다…현과 현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국가에 이르게 되는데 국가와 국가의 다툼과 관련해서는 일본의 '오오야케=공'의 구조에서는 그것을 넘어선 보다 큰 '오오야케=공'의 영역이라는 것은 상정되어 있지 않다. 즉, 조정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조정자가 존재한다면 보편 절대의 공평한 '천지의 공도'라는 것이 있고 또 그 '천지의 공도'가 모든 국가에서 준수된다는 전제가 공유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것에 의지하는 것은 '세상 물정에 어둡기 이를 데 없는 일'이라고 후쿠자와는 말하고 있다…그럴 경우에 국민은 국가라는 '오오야케=공'을 위해 진력하는 것, 즉 오로지 국가의 자기주장의 실현을 위해 진력하는 길 이외에는 아무런 선택지도 부여받지 못한다.

설령 그것이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행위라 하더라도 그 옳고 그름을 가리는 논리가 영역적인 '오오야케=공'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국민을 몰아붙인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비극은 무엇보다 일본의 '오오야케=공'의 이러한 몰원리적인 특성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앞선 글에서 일본은 중앙권력의 전복이 어려운 나라라고 말했던 이유도 이와 통한다. 이러한 '공과 사'를 '옳다 그르다'의 관점에서 보면 꼬인 한일 관계를 해소하기 힘들다. 이것을 일단 일본의 특징으로 이해해야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왜 비판적 성찰이 없어 보이는지, 대안은 무엇인지도 좀 더 잘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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