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제2차 베트남전쟁

1965년 7월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를 공식적으로 결정한 존슨 미국 대통령은 “웨스트모랜드 주월 미군사령관의 5만 명 증파요청을 수락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요청이 있을 경우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의지 표명이었다.

그러나 존슨은 군부(軍部)가 주장한 북진작전, 즉 “군사분계선(북위17도선)을 돌파해 하노이로 진격하자!”는 요구를 거부했다. 한국에서 경험했던 중국의 개입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지엠 일족(一族)은 1963년 11월 1일 발생한 쿠데타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지엠 실각 이후 이어진 쿠데타로 혼미를 거듭하던 남베트남 정국은 1965년 6월 응웬까오끼(Nguyen Cao Ky)가 수상에 취임해 실권을 행사하면서부터 쿠데타와 정권교체의 악순환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 베트남 중부의 고도(古都) 후에(Hue) 왕궁의 모습. 뗏공세 시 공산군이 한 달 동안 후에를 점령하면서 전쟁의 분위기가 반전됐다.

▲ 북베트남군과 베트공의 ‘뗏(Tet 구정)공세

1967년 말 북베트남군과 NLF의 베트공은 연합군의 적극적인 작전으로 점차 주민들로부터 분리되면서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인적자원과 보급능력 고갈로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반면 연합군은 미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끝없는 물량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북베트남과 NLF는 현재의 상황을 획기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조성해야만 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감행된 작전이 1968년 1월 31일(일부지역 30일) 새벽에 감행된 ‘뗏(Tet)공세’였다.

‘뗏(Tet)’은 음력 1월 1일로 베트남 최대의 명절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뗏’을 우리나라의 설과 추석을 합한 만큼이나 중요한 명절로 여긴다. 따라서 베트남 사람들은 예로부터 뗏을 전후해 1주일 이상의 휴가를 갖고 각종 민속행사를 즐긴다. 그 같은 관례에 따라 뗏에는 전쟁조차도 1주일 정도의 임시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명절을 즐겼다.

연합군측은 1968년도 뗏에도 당연히 임시 휴전협정이 체결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 결과 남베트남군의 많은 병력이 고향을 향해 휴가를 떠났으며, 우방국 병력들도 느긋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예년과 달리 1968년의 뗏은 휴전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지 못하고 일방적인 발표로 대체되었다.

반면 사전 치밀한 대공세를 준비했던 NLF와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 전 지역의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공세를 감행했다. 일찍이 볼 수 없는 대공세였다. 그 결과 베트공이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내부(內部)까지 침투했다가 반격으로 물러나는 등 사이공 시내에 대한 공세가 24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또한 중부의 후에(Hue)는 베트공과 북베트남군에게 피탈되어 25일간의 격렬한 시가전 끝에 겨우 탈환할 수 있었다.

▲ ‘뗏(Tet)공세’의 영향

1968년의 뗏공세로 인해 미군 1,100여 명과 남베트남 정부군 2,300여 명이 전사했으며, 민간인 사망자도 12,000여 명에 이르렀다. 반면 NLF와 하노이군은 4만여 명 정도가 전사했다. 또한 그들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함께 공급능력을 초과하는 장비 및 탄약 소모로 차후작전까지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됐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남베트남 주민들의 대규모 호응도 없었다. 따라서 군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NLF와 북베트남군이 대패(大敗)한 공세였다.

한편 “아시아의 약소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미군이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 TV뉴스를 통해 각 가정에 전달됐다. 따라서 미국 국민과 세계는 베트남전쟁의 실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이로 인해 미국의 베트남정책에 대해 언론과 국민의 비난이 빗발쳤다. 나아가 많은 수의 국민이 존슨 정부에 등을 돌리고 반전데모에 나섰다. 그때부터 베트남전쟁은 미국 사회의 내부분열 요인으로 작용하게 됐다.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자, 존슨 정부는 베트남정책을 재검토하고, 전쟁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최용호 사단법인 전쟁과평화연구소장(국제정치학박사)

 

 

.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