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한국군 참전 및 철군

'안보-경제' 두가지 해결노린 절실한 국가전략

많은 사람들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1960년대 우리나라는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운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 파병의 보다 정확한 배경은 “한국 정부의 집요한 파병요청을 미국 정부가 수용한 것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지원과 원조가 절실했던 한국 정부가 “미국의 지원을 보다 확대하기 위한 대가로 국군의 파병을 제안했다.”는 해석이 보다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 이승만 정부의 해외파병 시도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64년 5월 9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포함한 25개 자유우방국에 보낸 남베트남 지원요청 서한(書翰)을 접수하면서부터 였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지역에 한국군을 파병하기 위한 시도는 1954년부터 시작됐다.

1950년 북한의 남침을 자유우방의 도움으로 물리칠 수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1월과 6월 미국에 대해 “인도차이나 지역에 한국군 1개 사단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어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철수한 후인 1955년 10월 26일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의 남베트남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의 반공외교는 더욱 구체화됐다. 양국의 정상은 상호방문을 통해 유대를 굳건히 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지엠 정부가 요청한다면, 한국군을 파병해 남베트남을 돕겠다.”고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거듭된 파병제안은 현실성과 구체성이 없는 제안으로 당시 미국의 정책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대미(對美) 협상용 카드였다. 따라서 이승만의 제안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 박정희 정부의 베트남 파병 노력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보다 구체화된 것은 1961년 ‘5·16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최대과제는 미국과 안보동맹체제를 더욱 강화해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과 함께 ‘보릿고개’로 회자되던 경제적 어려움을 시급히 해소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박정희 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와 함께 국군의 베트남파병을 국가전략으로 선택해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다. 그러나 한·일 협상은 과거사 사과문제와 독도문제 등에 걸려 진척되지 못했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앞서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우선적으로 달성하기위해 한·미 정상회담 등을 통해 대미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남베트남 정부와도 접촉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파병을 위한 노력 역시 미국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 케네디 대통령 부처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모습. 박정희 의장은 케네디와 첫 번째 만남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다.

◇ 한국군 파병제안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과 조치

박정희 정부의 집요한 파병제안에 대해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할 경우, 북한의 도발가능성과 함께 중국·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베트남 문제는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아 연합국가들의 지역 안보체제를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SEATO를 중심으로 베트남을 지원한다.”는 미국의 베트남 정책은 “남베트남이 SEATO 가맹국이 아니다.”는 이유로 프랑스와 파키스탄이 강력히 반대함으로써 실현되지 못했다.

SEATO 국가의 반대에 직면한 미국 정부는 그 대안으로 베트남을 지원할 자유우방의 범위를 확대해 한국을 포함한 25개 자유우방에 1964년 5월 9일 ‘남베트남 지원’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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