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포화속에 사라진 호국영령들

-적 참호돌파 솔선수범

▲ 정정능 소위의 생전모습

수도사단 제1연대 제5중대 제3소대장이었던 고 정정능 중위는 1966년 3월 24일 띤빈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용맹스러운 소대장이었다. 그가 전사하기 2개월 전 고보이평야에서 수행된 비호6호 작전에서도 정정능 소위의 용맹은 베트콩을 압도했다. 정부는 그때의 전공을 높이 평가해 정정능 소위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비호6호 작전 직후부터 정정능 소위는 중대장 박동원 대위의 지휘 하에 피나는 훈련에 돌입했다. 중대장은 “적이 사격해 올 경우 엎드리지 말고 즉각 응사 및 돌격하라!” 그리고 “늪지대를 신속히 통과하라!” 등 작전지침을 주문했다. 그런 중대장의 지침을 가장 잘 소화한 소대가 바로 정정능 소위의 제3소대였다.

◇ 맹호5호 작전과 띤빈 전투

제5중대가 경험했던 비호6호 작전의 교훈과 피나는 훈련결과가 나타난 것은 맹호5호 작전이었다. 1966년 3월 24일 시작된 맹호5호 작전은 비호6호 작전의 교훈을 감안해 야간 은밀기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날 새벽1시에 기지를 출발한 각 중대는 지나치는 마을에 잠복한 지방 베트콩에게 아군의 기도가 노출되지 않도록 가급적 크게 우회하는 통로를 택했다.

각 중대는 6시경 날이 밝을 무렵 지정된 전개지점에 도달했다. 각 중대가 주간작전으로 전환하면서 기습공격을 감행하자 미쳐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했던 1개 중대 규모의 베트콩이 ‘띤빈마을’ 일대로 집결해 강력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제2대대장 이필조 중령은 띤빈마을에 집결된 적을 방치할 경우 아군의 임무수행에 막대한 타격을 주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그들이 대응준비를 갖추기 전에 신속히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제6중대와 제7중대로 그들의 퇴로를 차단해 포위망을 조이는 한편 중앙제대인 제5중대에게 띤빈마을 중앙을 돌파해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날이 밝으면서 인접 제6중대에 발견된 1개 분대의 베트콩이 정정능 소위가 배치된 제3소대 전방에 나타났다. 정소위는 즉각 중대장에게 보고하는 한편 1개 분대로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베트콩은 늪지와 논두렁 등 지형을 교묘히 이용하며 띤빈마을로 도주했다.

그 같은 상황에 대비해 중대는 늪지대 통과, 돌격 등의 훈련을 거듭했던 것이다. 따라서 정정능 소위와 소대원들의 추격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1개 중대 이상의 베트콩이 띤빈마을에 요새진지를 구축해 놓고 한국군의 공격을 유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제5중대의 띤빈전투 상황도

◇ 정정능 소위의 활약과 전사

베트콩의 기도를 간파하지 못했던 정소위가 마을 입구에 도달하자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 3면에서 총탄이 비 오듯 날아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위기에 빠진 정소위가 그 곳에서 후퇴한다면 추격병력 전체가 몰살될 형편이었다. 그는 “적이 사격할 경우 즉각 돌격으로 격파하라!”는 중대장의 평소 훈련지침에 따라 응사와 함께 적의 참호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때 정소위와 함께 돌격하던 분대장 이향근 하사가 베트콩 1명을 사살했다. 최용호 상병도 베트콩 3명을 백병전으로 처치했다. 그러나 정소위가 다음 참호를 점령하기 위해 뛰어든 순간 총탄이 그에게 집중되면서 흉부와 복부가 관통된 정소위는 선혈을 뿌리며 쓰러졌다.

소대장의 뒤를 따르던 이성만, 박용성 상병도 육박전을 벌이다 수류탄이 폭발하면서 베트콩과 함께 산화했다. 그 와중에 정소위는 분대장 이향근 하사를 불러 “적의 참호를 빨리 탈취하라, 그리고……,”라며 끝을 맺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돌격을 계속한 이향근 하사는 저항하는 베트콩을 사살하며 그들의 외곽 참호를 모두 점령했다. 확인된 베트콩 시체는 11구였으며 포로1명, 그리고 경기관총과 탄약 등을 노획했다. 그 후 소대는 중대장이 급파한 부중대장 정주영 중위와 합류했지만 정정능 소위는 출혈과다로 숨지고 말았다.
정부는 전사한 정소위의 용맹과 솔선수범을 기리며 그에게 충무무공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돌격조 앞장선 소대장

수도사단 제1연대 제10중대 제2소대장으로 파월된 김무석 중위는 1966년 1월 10일 대대의 급수차량을 폭파하고 도주한 베트콩을 추격했다. 그리고 그들의 은거지를 찾아내 기습적인 작전으로 베트콩 20명을 사살하고 각종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달성했다. 그 공로로 그는 그해 3월,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고 휴양지 붕따우(Vung Tau)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 김무석 대위와 띤빈 전투

▲ 김무석 중위의 생전모습

그때 사단은 파월 이후 최초의 사단급 규모 작전인 맹호5호 작전을 앞두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책임감이 워낙 투철했던 김무석 중위는 자신만의 휴양이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그가 휴가를 마친 후 복귀한다면 소대원들은 소대장도 없이 맹호5호 작전을 수행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대원들에 대한 걱정에 짐을 챙겨 복귀한 그는 복귀신고를 마치자마자 작전준비를 서둘렀다.

마침내 3월 24일 아침, 맹호5호 작전이 시작됐다. 소대는 중대와 함께 대대의 맨 동쪽지역 ‘빈안(Vinh An)마을’을 목표로 수색을 시작했다. 그 지역은 제2대대가 담당한 ‘띤빈마을’ 바로 서북쪽이었다. 그때 야자수와 바나나가 우거진 숲에서 1개 분대 규모의 베트콩이 띤빈마을 방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김중위는 즉시 1개 분대로 소대를 엄호하게 한 후 선임하사조를 동쪽으로 우회시키고 나머지 병력을 자신이 지휘해 그들을 추격했다.

곧이어 빈안마을 앞 50m에 이르자 갑자기 서측방 후방의 대나무 숲에서 총격이 집중되면서 김정부 일병이 복부를 관통당해 쓰러졌다. 김무석 중위는 재빨리 김일병에게 접근해 그를 후방으로 옮긴 후 추격을 계속했다. 이어 두 병의 병사가 같은 방향에서 날아온 총탄에 의해 쓰러 졌다.

상황을 파악해 본 결과 베트콩의 주력은 대나무 숲에 매복하고 있으며 1개 분대는 김무석 중위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던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태를 파악한 김중위는 서쪽의 대나무 숲에 숨어 있는 베트콩 주력을 먼저 격파하기로 결심하고 사수가 부상당한 자동화기를 자신이 직접 들고 돌격을 감행했다.

때마침 중대장도 사태를 파악하고 제1소대에게 제2소대를 지원해 대나무 숲 공격에 가담하게 했다. 따라서 거의 동시에 두개 방향에서 시작된 제10중대의 공격을 견딜 수 없게 된 베트콩은 분산해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파악된 베트콩의 규모는 2개 소대 정도로 추산되었다.

호기를 포착한 김무석 중위가 도주하는 베트콩을 계속 추격하자 1개 소대규모로 추산되는 베트콩이 또 다시 띤빈마을을 향해 도주하고 있었다. 김중위가 그들을 계속 추격함에 따라 김중위는 어느 사이에 제5중대가 전투를 전개하고 있는 띤빈마을 서측방 공동묘지가 있는 능선에 도달했다.

그 곳에서 잠복호를 구축해 저항하는 베트콩 진지를 하나하나 격파해 나가던 김무석 중위가 묘지를 은폐물로 삼아 분대장에게 명령을 하달하고 있을 때였다. 김중위가 있던 바로 그 묘지에 하단에 잠복호를 구축해 은거하고 있던 베트콩이 불과 2m 전방에서 그를 향해 사격했다. 그는 두부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 직후 도착한 제5중대 제2소대가 베트콩 잠복호에 수류탄을 투척해 그들을 모두 폭사시켰는데 그 곳에는 베트콩 2명이 은거해 있었다.

편모슬하에서 외롭게 성장했던 김무석 중위는 남달리 책임감이 투철했으며 소대원들을 친형제처럼 여겼다. 그 때문에 자신의 위험은 생각지도 않고 휴가를 반납해 가며 작전에 참가했던 것이다. 그가 쓰러진 직후 현장에 도착한 중대장에게 김무석 중위는 자신이 끼고 있던 임관반지를 건네며 “이 반지를 어머니에게 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며 후송헬기에 실렸다.

김무석 중위는 뀌년 제6후송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수술 도중 숨을 거두었다. 중대장에게 남긴 부탁은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정부는 김무석 중위의 책임감과 부하사랑 정신을 높이 평가해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그를 호국인물로 선정해 기리고 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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