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포화속에 사라진 호국영령들

제2해병여단 제3대대 작전보좌관으로 베트남에 파병됐던 조경식 대위는 1967년 1월 10일 쭈라이지역 짜빈박 전투에서 전사한 영웅이다. 1966년 8월, 베트남 중부의 꽝응아이성에 있는 쭈라이지역으로 이동했던 해병 청룡부대는 1967년 1월 5일부터 투망작전을 전개했다. 투망을 던져 고기를 잡아내듯 지역 내 베트콩의 은거지를 소탕한다는 의미를 가진 작전이었다.

투망작전과 짜빈박 전투

그때 제3대대는 짜빈박 마을 남쪽 90고지에 위치한 제9중대 기지를 전술지휘소로 이용했다. 작전은 헬기를 이용해 베트콩의 예상 은거지에 착륙한 후 수색하는 것으로 투망작업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기상이 좋지 않을 경우 헬기를 지원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기상이 작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작전 6일째인 1월 10일, 9시가 되어도 기상이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았다.

대대장은 일단 작전을 연기하기로 결심하고 여단의 승인을 받았다. 작전이 연기되자 비좁은 중대의 기지에 머물러 기다리기 보다는 일단 대대본부로 복귀했다가 상황을 봐가며 작전을 계속하기로 하고 복귀용 헬기를 요청했다. 작전을 지원하지 못한 헬기가 대대본부의 복귀를 위해 지원될 수는 없었다.

대대장은 참모들의 건의를 종합해 지상이동을 결심했다. 오후 2시에 대대전술기지로 사용해오던 제9중대 기지를 출발해 차량접근이 가능한 안디엠 마을까지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다. 제9중대 기지에서 짜빈박 마을을 거처 안디엠 마을에 이르는 4㎞ 구간은 평소 제9중대의 보급 추진 등으로 2~3명 단위의 병사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참모들도 4㎞ 정도야 가볍게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 선인장 지대를 공격하는 장병들의 모습

제9중대에서 차출된 제2소대가 전위부대로 경계를 제공하기로 했다. 대대본부요원 31명이 제2소대의 뒤를 따랐다. 행군병력은 대부분 M1 또는 칼빈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당시 교육용으로 초도 보급된 M16소총이 전위소대와 대대본부에 1정씩 있었다. 지원화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베트콩은 짜빈박 일대를 자유롭게 통행하는 한국군 병력을 습격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루 전날 200여 명으로 편성된 베트콩은 짜빈박 마을 동북쪽 197고지 일대에 잠입해 한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앞에 20여개의 무전기 안테나를 가진 집단이 나타났다. 베트콩은 최소한 대대본부 이상의 지휘부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표적이었다.

베트콩의 기습공격이 시작되면서 전위소대가 어이없이 무너졌다. 위기는 즉각 대대본부로 밀어닥쳤다. 베트콩의 일부는 대대본부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우회기동을 시작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미 해병 항공연락장교 오스월트 대위는 논두렁을 뛰어 넘다가 다리를 관통당해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때 대대장은 선임하사관의 건의에 따라 소수의 경계요원과 함께 오던 길을 되돌아 제9중대 기지로 대피했다.

◆조경식 대위의 활약과 전사

▲ 조경식 대위의 생전모습

제대 중앙에 남아있던 작전보좌관 조경식 대위는 작전하사관 등 노련한 부사관들과 함께 용전분투했으나 부상자가 속출했다. 군의관 김수현 중위는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부상자 치료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드디어 아군의 후방을 차단한 베트콩이 대대본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어깨에 부상을 입은 조경식 대위는 나머지 요원들을 지휘해 권총으로 그들과 맞서며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조경식 대위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작전계획 투명도 등 비밀서류들을 방탄복 깊숙이 집어넣고 최후까지 싸우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권총과 지도까지도 가슴에 안고 앞으로 쓰러져 적에게 피탈되지 않도록 했다.

조경식 대위의 장렬한 전사는 살신성인 희생정신의 귀감이었다. 조대위의 전사소식을 접한 정부는 그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해 높은 뜻을 기렸다. 그를 전쟁기념관은 그를 호국인물로 선정해 추모하고 있다.

◆전창우 소위의 활약과 전사

▲ 전창우 소위의 생전모습

제2해병여단 제9중대 제3소대장 전창우 소위는 투망작전 시 짜빈박에서 습격당한 제3대대 본부요원을 구출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전사한 영웅이다.

제2소대 통신병으로부터 대대본부의 행군제대가 피격당한 소식을 접수한 제9중대장 김윤영 대위는 짜빈박 일대에서 정찰 중이던 제1소대에게 긴급명령을 내려 교전지역으로 증원하도록 했다. 이어 관측반으로 안디엠 마을에 파견되어있던 전창우 소위의 제3소대에게도 출동명령을 내렸다. 자신은 10여 명의 중대본부 요원을 직접 지휘해 짜빈박 마을로 출동했다.


증원병력 중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제9중대장은 3시40분경 도착한 제1소대와 합류해 행군제대 후방을 차단하고 있는 베트콩을 공격했다. 그러나 증원병력은 베트콩의 맹렬한 사격을 받아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후미에 있던 일부 부상자를 구출하는데 그쳤다. 그때 미 해병 항공연락장교 오스월트 대위가 구출됨으로써 그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항공화력을 지원받게 되었다.

그 시기에 중대장으로부터 긴급 출동명령을 받았던 전창우 소위는 즉각 출동 가능한 병력만을 인솔해 현장으로 향했다. 너무 급하게 서둘렀던 관계로 2개 분대에도 미치지 못한 병력이었다. 전창우 소위는 용맹스러운 장교였다. 또한 그는 평상시에도 투철한 군인정신과 정의감을 바탕으로 원칙주의에 입각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전창우 소위는 1966년 11월에 있었던 용안작전에서 대대규모의 베트콩이 중대기지를 기습했을 때 그들의 주공부대를 물리치는 전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그는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전소위는 그 같은 전투경험과 함께 항상 앞장을 서는 성격때문에 그날도 대대본부요원 피습상황을 접수 하자마자 앞장서서 2㎞ 정도를 달려 짜빈박 전투현장에 도착했다.

당시 상황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가진 적이 제9중대의 전위소대와 대대본부 요원을 포위하고 있어 지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적의 상황을 명확하게 전파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휘자로서 용맹과 담력으로 맨 선두에서 근접전투를 계속해 나갔다.

그때 옆에 있던 염규진 일병이 쓰러지면서 대검을 든 베트콩이 염일병에게 달려들자 바람같이 달려간 전소위는 권총을 발사해 적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 옆의 적이 발사한 총탄에 부상을 입었다. 그는 자신의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의 방향을 대원들에게 제시하며 품속에 있던 지도를 꺼내 적의 위치를 확인하다가 적의 집중사격을 받아 지도를 움켜쥔 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전소위의 용맹과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해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해 그의 높은 뜻을 기렸다. 또한 전쟁기념관은 그를 호국인물로 선정해 추모하고 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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