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한일 관계는 복잡하게 꼬여있다. 단기간에 풀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일본의 총리가 바뀌었다고 한반도 정책이 갑자기 바뀔 리도 만무하다. 정책을 바꾼다는 것은 기존 정책의 한계를 자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기존 정책이 옛 영화에 대한 회고 및 회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수 세력일수록 기존의 정책적 기조를 계속 소환하고 계승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일본을 대하는 한국인의 정서도 일종의 정신적 외상과 연결되어 있기에, 외교관이나 외교 정책 몇 가지를 바꾼다고 대일 관계가 급속히 호전되는 것도 아니다. 한일 관계의 전환은 양국 국민이 밑바닥에서부터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장기적 노력을 기울일 때에야 가능하다. 특히 양국 시민사회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보통의 일본인에게 '나는 무종교'라는 말은 익숙하다. 자신에게는 종교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특정 종교단체에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분석하면 일본인은 여러 가지로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도의 국가화 과정을 설명하며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상당수 일본인은 문화화한 애니미즘적 혹은 자연신앙적 종교성을 여전히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종교사회학자 이노우에 노부타카(井上順孝)는 가령 일본의 민속 행사도 그저 의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연중행사와 인생의례 등이 완전히 세속화된 것은 아니며 여전히 종교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신도습속이라고 부를 만한 많은 전통적 습속의 기본적 기능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지난 호에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의미에 대해 보았듯이 일본에서의 '사(私, 개인)'는 '공(公, 민족·국가·천황)'에 종속적이었고 '공'은 '사'에 대해 우월했다. 민간 신앙이었던 신도(神道)를 메이지 시대에 들어 국가종교 형태로 흡수 확대하면서 천황 중심의 수직적 국가를 만들어간 과정은 공적 영역이 개인을 없앰으로써[滅私]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뜻이다. 메이지 이래 일본 국민에게는 국가라는 '오오야케(公)'를 위해 진력해야 하는 멸사봉공적 자세가 강력했고 또 그렇게 요구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하는 데까지 이어진 것이다.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는 이렇게 정리한다. "'사'가 일본에서는 문지방 안의 자가(自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지난 호에 보았지만 일본 최초의 성문헌법인 쇼토쿠 태자의 '십칠조헌법'(제15조)에서는 "사(私)를 등지고 공(公)을 향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다"고 규정하고 있다. 신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신분사회라면 당연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신도를 국가적 정책 속에 융합시켜 천황 중심의 '국체(國體)'를 확립시켜온 메이지 시대의 정책은 멸사봉공적 공공성을 잘 보여준다. 불교철학자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에 의하면 메이지 시대 이래 일본 국민에게는 국가라는 '오오야케'(公)를 위해 진력해야 하는 멸사봉공적 자세가 강력했던 탓에 2차세계대전까지 낳았다고 한다. 미조구치 유조(溝口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공과 사를 분명히 하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공과 사의 영역이 분명한 나라가 일본이다. 대외적으로 의사 표명을 해야 할 경우 공적 영역이 우선적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사'가 '공'을 그다지 침범하지 않는 까닭에 사회는 비교적 안정적이다. 물론 여느 나라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적 영역보다는 공적 영역의 힘이 셌다. 더욱이 수직적 신분 사회일수록 '사'라는 것은 없었거나 '공'에 종속적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역사 속에서도 확인된다.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는 일본과 중국 고전에서의 공(公)의 용례를 종합하며 이렇게 말한다. "중국의 공(公)에는 공동체의 대표성이라는 의미와 함께 '천(天)'의 초월성을 기반으로 최고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한국인에게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지 않는 나라'라는 인식이 있다. 일본인에게 한국은 이미 사과했는데도 또 사과하라며 우기는, '신뢰하기 힘든 나라'라는 인식이 있다.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해석에서 그런 인식의 차이를 잘 볼 수 있다. 한국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부터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해왔다. 14년이 지난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타결지으면서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정부차관(3억 달러의 상업차관 별도)을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받았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에 합의했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젊은이들은 별로 쓰지 않지만 한국의 기성세대가 여전히 사용하는 탄식어가 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인간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이를 향해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며 경고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면서 명백한 진실을 가리는 행위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예들은 한국인이 하늘을 세상에 관여하는 초월적 인격자처럼 생각한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인간적 양심과 도덕의 근원 혹은 진실의 대명사처럼 여기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한국인에게 하늘은 물리적 공간의 차원을 넘어 종종 세계적 상황과 개인적 실존의 이유를 설명하는 근원이 되기도 한다. 단군신화가 '천신'(天神) 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신다는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전후 일본은 천황제를 전통과 상징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미국식 대의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했다. 정권의 잘잘못에 따라, 국민의 지지 여부에 따라 정권이 교체되기도 하는 것이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특징이지만 전후 일본은 실질적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본 적이 없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특수를 누리면서 1980년대까지 승승장구하던 일본 경제가 1990년대 이후 정체되고 거품도 꺼지면서 2009년 처음으로 민주당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내 수권 정당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고 3년여 만에 다시 야당이 되었다. 자민당이 천황제 이후 일본의 정권을 계승하며 만년 여당의 역할을 해왔으니 일본은 사실상 '중앙 권력의 전복이 어려운 나라'다. 그 역시 메이지 정부 이래 강력했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메이지 시대 이래 천황제에 기반한 '종교적 정치'는 일본의 보수적 애국주의의 원천으로 작용해왔다. 종교적 정치는 보수층에게 더 체화되어왔지만 문화적 정서 전반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의 심층 정서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기존 종교 시스템을 노골적으로 계승하려는 극우세력의 활동도 계속 이어진다. 일본인의 심층적 정서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야 일본의 보수 정권이 헌법을 개정하려 시도하는 이유, 한국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이유도 보이기 때문이다.1945년 8월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메이지 정부의 '종교적 정치'가 어느 정도 성공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전통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첫째는 제사 양식을 통해 혼령과 상호 관계를 맺어온 일본인의 오랜 전통이고 둘째는 인간이 참배로 위로하지 않으면 무언가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신도식 원령(怨靈) 신앙이다. 죽은 이의 혼령을 중시하는 분위기, 인간 사후에 신격화하는 정서는 불교도든 신도계 종교인이든 일본인에게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민속학자 고마쓰 가즈히코(小松和彦)는 "중요한 것은 어떤 이유에선가 사람을 사후에 신격화하고 그 결과 그 사람을 제사 지내기 위한 시설을 세운다는 점이다. 그 신격을 신으로 부르든지 부처로 부르든지, 아니면 영혼이나 신령으로 부르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도 계통의 종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일본에서 천황제의 역사는 유구하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진무천황(神武天皇) 이래 현재 126대 나루히토(德仁)에 이르기까지 천황의 계보가 끊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정도라면 천황제가 현재까지도 일본 국민 안에 온전히 체화되어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속사정은 그렇지만도 않다. 근대적 의미의 천황제는 위(권력)로부터 아래(국민)로 이식된 문화이다. 그러한 이식이 가능하려면 국민이 어떤 형식이든 위로부터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실제로 권력의 힘때문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일본 국민이 천황제를 '수용'해온 것은 분명하다. 동시에 권력을 '이용'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가령 메이지 시대 이래 군부는 군부대로 천황의 권위를 이용해 침략 전쟁을 국내적으로 정당화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제사 정책이 가정의 제사 분위기에도 영향을 주면서 국가가 천황을 신적 가부장으로 하는 거대 가족처럼 작동해왔다. '가족국가'라는 말도 비교적 자연스러웠다. 여기에는 나라[國]를 집안[家]처럼 여기는 동아시아의 유교 분위기도 한 몫 했지만 국가적 차원의 제사를 강조하던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는 좀 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불교철학자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는 '가족국가'라는 모순된 명칭이 일본인에게는 별 모순 없이 '당연한 개념처럼 통용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거대 공동체의 주요 작동 원리는 이미 보았듯이 위령 행위에 기반한 조상 제사였다. 종교사회학자 이노우에 노부타카(井上順孝)에 의하면, 흔히 조상신은 자신과 일족(一族)을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지난 호에도 보았듯이 제사를 국가의 통치 수단으로 삼는 순간 그것은 외견상의 종교적 숭고함이나 순수한 정책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제사의 대상이 국익을 위해 '조작'될 수 있을 뿐더러 종교적 세계를 끌어와 침략 행위조차 숭고한 일인 양 정당화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외면한다. 그곳에서 부각되는 것은 국가 자체이다. 국가가 국가를 위하여 종교적 차원의 제사를 지내는 셈이다. 이런 현상은 어느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는 대외전쟁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전쟁을 주도했던 나라들이 이러한 국가관에 입각해있다. 일본도 국가적 영광을 내세우면서 자국을 위해 죽은 이를 제사 형식을 갖춰 받들어왔다. 메이지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야스쿠니신사는 메이지유신 과정에 벌어진 내전 희생자들의 혼령을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 지내기 위해 창건된 신사이다. 도쿄쇼콘사(東京招魂社)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가 1879년 '나라[国]를 평안히 하는[靖] 신사(神社)'라는 의미에서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로 개칭했다. 그 뒤 청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과정에 희생당한 전몰자의 영혼을 합사하면서 현재는 246만여 혼령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신사는 이들 혼령을 제사함으로써 국민으로 하여금 호국의 정신과 자세를 갖게 하는 데 기여해 왔다. 물론 공식 취지와는 달리 일본을 위해 싸운 전몰자들을 모두 모시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일본 정치의 제국주의화에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일본의 우익은 대체로 '반한'(反韓) 혹은 '혐한'(嫌韓) 정서를 지니고 있다. 도쿄의 한인 밀집 지역인 신오쿠보 거리에서는 '조선인은 일본을 떠나라'는, 일본 극우단체의 험악한 목소리가 종종 들려온다. 일본의 우익 정치인도 비슷한 정서를 지닌다. 정무적 감각·외교적 파장 때문에 노골적인 표현을 하지 않을 따름이다. 이와 비슷한 정서를 가지던 일본의 총리가 7년 8개월 만에 바뀌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물러나고 같은 자민당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를 정점으로 하는 새 내각이 들어섰다. 아베도 대단히 우익적인 인물이지만 스가도 그 못지않게 우익적이다. 한국에 대한 반감도 크다. 새 총리가 들어섰어도 대 한국 정책이 별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메이지 정부는 전쟁 중에 죽은 이의 혼령에 대한 제사를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 적용했다. 이 때 제사의 대상이 정말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전쟁의 희생자냐 아니냐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신조어 '호국영령'은 국가와 국민의 제사 대상으로 재구성된 일종의 '담론상의 전사자'(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의 표현)였다. 국가를 위해 존재해달라고 국가에 의해 요청된 영혼인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이러한 영혼의 의미를 정치적으로 홍보하고 교육함으로써 국민으로 하여금 실제로 호국적 정신을 갖도록 몰아갔다. 고야스 노부쿠니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영령을 필요로 한다." 조상 제사를 확장해 국가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제안들은 이전부터 있어 왔다. 가령 오규 소라이(荻生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지난 호에 본대로 메이지 정부는 민중의 관습 정도로 치부될 종교 현상을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국가가 제사 문화를 강화하면서 제사의 정점에 있는 천황을 중심으로 수직적 사회 체계를 구축했다.자연스럽게 국민은 혼령·조상신 등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다. 사후 혼령이 있느냐 없느냐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혼령의 유무를 포함하는 귀신 담론 자체가 혼령이나 조상신을 그 사회 속에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었다. 혼령 혹은 영혼은 그에 제사지내는 인간의 의도에 맞게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일본인 대다수는 특정 종교 단체에 속하는 종교생활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스스로 종교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무종교'라는 말이 익숙하다. 하지만 심층으로 들어가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신도(神道)', 특히 메이지 시대 이래 국가주의적 이념과 뒤섞인 신도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문화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특정 '종교 단체'에 속해있지 않을 뿐 일본인 상당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적' 행동을 할 때가 많다. 이 부분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보수는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호하고[保] 지키는[守] 태도다. 그런데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은 대체로 한국을 반대하거나 싫어한다. 이들이 보호하려는 것과 지키는 행위에 한국은 걸림돌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본 보수와 한국 보수의 차이점극우 단체인 '재특회'(在特會[자이토쿠카이]·재일 한국인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의 혐한(嫌韓) 시위가 대표적이다. 보통 한국인 입장에서는 불쾌하고 무례하지만 일본의 보통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자기가 차마 하지 못할 말을 대신 해주는 시원함이 있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한일 관계가 복잡해진 원인은 짧게는 일제강점기(1910-1945)에서 찾을 수 있고 더 올라가면 임진왜란(1592-1598)에까지 이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 정벌의 일환으로 조선을 침략해 6년간 두 차례에 걸쳐 전 국토를 유린하면서 조선은 큰 상처를 받았다. 일본은 결국 패퇴했지만 일본에 대한 조선의 감정은 격해졌다.그 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德川) 막부(1603-1867)가 새로 정권을 잡으면서 100년 넘게 이어지던 센고쿠시대(戰国時代)의 내전은 종식되고 조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