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인 조계사는 항일투쟁과 민족종교를 품어 안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계사는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10년 조선불교의 자주화와 민족자존 회복을 염원하는 스님들에 의해 각황사(覺皇寺)란 이름으로 창건됐다. 당시 각황사는 근대 한국불교의 총본산으로 한국불교 최초의 포교당, 일제 강점기하 최초의 포교당이자 사대문 안에 최초로 자리 잡은 절이었다.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으로 인도의 계급제도인 수드라급으로 격하시킨 유교가 일제에 의해 사멸된 이후 절이 처음으로 도성 안에 창건된 것이다. 현재의 조계사 자리로 옮긴 건 1938년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옮기는 형식을 취했다. 태고사를 창건하면서 현 대웅전은 전라북도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
대부분 절에는 입구에 해당하는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사천왕(四天王)이 있다. 4명의 호법신장이 절 안의 부처님과 신도들을 지키는 호위무사 역할을 맡고 있다.이 천왕사들은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 잔뜩 치켜세운 검은 눈썹, 크게 벌어진 빨간 입 등 두려움을 주는 얼굴에 손에는 큼직한 칼 등을 들고, 발로는 마귀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때 발밑에 깔린 마귀들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하는 상을 하고 있다.원래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해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됐다고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 진관사(津寬寺)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이자 국찰(國刹) 역할을 했다. 고려 시대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나라를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한 사연은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진관사는 서울 은평구 진관길 73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사찰로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걸쳐 나라를 위해 순국한 이들의 혼을 달래는 수륙재(水陸齋)를 왕실의 주관하에 행했던 국찰이었다. 진관사 사적기에 따르면 진관대사와 현종의 사연은 이렇다.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는 그의 아들 송(誦)이 왕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록펠러가 어린 시절, 착한 일을 해서 동네 어른이 ‘두 손 가득 원하는 만큼 사탕을 집으라’고 했는데 아버지에게 달려가 사탕을 집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다.이를 궁금하게 여긴 어른이 물으니 ‘아빠 손이 훨씬 더 커서 저보다 더 많이 사탕을 집을 수 있잖아요.’ 했다고. 위인전에 흔히 나오는 위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가짜 예화임에 틀림없지만, 예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옳다.어린 록펠러는 자신의 손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손을 신뢰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더 힘 있는 손에 맡겨야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케이스들은 얼마든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衆中無盡)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해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銀海寺)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은해사를 거쳐 간 역대 고승과 근현대사에 한국 불교를 이끈 스님 덕분에 은해사는 특히 조명을 받는 절이기도 하다. 신라 시대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거대 담론으로 화쟁 사상을 설파한 원효 스님과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신 의상 스님에 이어 고려 시대에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인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저술한 보각국사 일연스님 등의 고승을 배출한 곳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은해사에서는 매년 일연스님과 원효스님의 추모 다례 제를 열고
인천 강화도 서쪽 석모도에 자리하고 있는 보문사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 남해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기도 도량이다. 석모도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 아래 마애 관세음보살님은 탁 트인 서해를 바라보며 중생들을 살펴준다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 4년인 635년에 금강산 보덕암에서 수행하던 회정스님이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강화도로 내려와 창건했다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삼산남로828번길 44에 있는 보문사(普門寺)에는 기도 영험담이 넘쳐난다. 창건 당시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 이름을 따서 낙가산(洛迦山)이라 하고,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 무변함을 상징해 보문사라 했다고 한다. 보문사 사적기에 따르면 보문사를 창건한 지 14년만인 649년 석가모니부처님과 미륵보살 등 2
우리나라에서 최고 지존을 뜻하는 왕 또는 대통령을 봉황(鳳凰) 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로 표현했다. 대통령을 상징하는 대외서신 등 청와대를 상징하는 문장에는 봉황 두 마리를 새겨넣고 있다. 그 봉황이 머문 절이라는 뜻을 가진 봉정사(鳳停寺)는 절 이름답게 고려 이후 최근까지 최고 지존들이 머문 곳이다. 사람 이름에도 그 사람의 역사가 간직해 있듯이 봉정사도 절 이름답게 천년을 넘어 봉황들이 머물고 가고 있다.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 고려말 공민왕 이후 지난 1999년 4월 21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2018년 7월 28일 문재인 대통령, 2019년 5월 23일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차남인 앤드루 왕자도 각각 방문한 절이 봉정사이다. 특히 지난 1999년 영국 여왕 엘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려말 국사 나옹선사가 지은 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蒼空兮要我以無垢)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聊無愛而無憎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如水如風而終我) 나옹선사는 스승인 인도 출신 지공스님으로부터 철저한 불이(不二) 사상과 간화선(看話禪) 임제종의 선풍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이를 무학대사에게 전해 고려말 침체한 불교계를 혁신을 일으켰다고 한다. 바로 지공, 나옹, 무학 3대 화상(3大和尙)이 터를 잡고 창건과 중창해서 천년 국찰의 틀을 세운 곳이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281 회암사(檜巖寺)다. 지공스님의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禪賢)로 승맥으로 볼 때 가섭(迦葉)의 108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숭유억불 정책을 표방했으면서도 비운에 간 경처(景妻)인 신덕왕후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세운 왕실 원찰로 조선 시내 내내 왕찰의 면모를 이어온 절이 바로 흥천사(興天寺)이다. 이성계의 경처(京妻, 서울에 있는 두 번째 부인)로 국모 역할을 했던 신덕왕후와 왕자의 난으로 숨진 둘째 부인 아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이성계가 세운 조선 최초의 절이다. 서울시 성북구 흥천사길에 있는 흥천사(興天寺)는 또 이성계의 둘째 아들 태종의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여장부 역할을 한 이방원의 비 원경왕후의 한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발원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 흥천사는 한글을 창제하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했던 신미대사와 세종대왕이 인연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자, 아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숭유억불 정책을 표방했으면서도 비운에 간 경처(景妻)인 신덕왕후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세운 왕실 원찰로 조선 시내 내내 왕찰의 면모를 이어온 절이 바로 흥천사(興天寺)이다. 이성계의 경처(京妻, 서울에 있는 두 번째 부인)로 국모 역할을 했던 신덕왕후와 왕자의 난으로 숨진 둘째 부인 아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이성계가 세운 조선 최초의 절이다. 서울시 성북구 흥천사길 있는 흥천사(興天寺)는 또 이성계의 둘째 아들 태종의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여장부 역할을 한 이방원의 비 원경왕후의 한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발원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 흥천사는 한글을 창제하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했던 신미대사와 세종대왕의 인연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자, 아버
불가에서 계정혜(戒定慧)를 통달한 스님들이 열반 시에 나온다는 사리(舍利)가 증식과 분식의 묘용(妙用)을 부려 세운 사찰이 있다.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공원 터에 있었던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이 조선 태조 때 조계종(曹溪宗)의 본사로 된 사연은 이렇다.이성계 손자이자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세조 10년인 1464년 4월 경기도 남양주 회암사(檜巖寺) 동쪽 언덕에 석가모니의 사리(舍利)를 봉안 후 ‘원각경(圓覺經)’을 설법하자, 그날 저녁에 공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습과 함께 사리가 분신(分身)하여 800여 개가 되었다고 한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소백산에 고려시대 의천 국사 이후 대한불교천태종을 부활시킨 상월 원각 스님의 이야기는 드라마틱하다. 원각 상월(圓覺上月, 1911~1974) 스님이 1945년 5월 ‘억조창생 구제중생 구인사(億兆蒼生救濟衆生救仁寺)’라는 이름으로 중창했지만 돌이켜보면 지금의 4차원 및 4차산업혁명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근현대사의 민족 종교 창시자들의 이야기와 대동소이하지만, 특히 상월 스님의 출가 전 행보는 이미 출가 전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으로 일대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불교를 개창한 전남 영광 소태산 박중빈 교주처럼 상월 조사도 태어날 때부터 각성(覺性)했다고 한다. 특히 상월 조사처럼 대한불교천태종 원장 스님들은 출가 이전에 이미 깨달아 스님들이 비밀리에 그 존재를
산 내 비밀을 감춰놨다는 뜻을 지닌 내장사(內藏寺)는 백제 무왕 37년인 636년에 영은(靈隱)조사가 영은사(靈隱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영은(靈隱) 역시 신령스러운 영(靈)이 숨어있다는 법명이고 보면 내장사와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 한국 산사(山寺)의 대부분의 이름이 초기 개창 시와 다르지만, 영은사(靈隱寺)와 내장사(內藏寺)는 그 깊고 깊은 뜻으로 볼 때 비슷한 의미를 그야말로 간직하고 있다. 신선봉으로 오르는 오른쪽 절벽 위에 암굴(岩窟)을 용굴(龍窟)이라고도 하고 그 터에 용굴암(龍窟庵)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임진왜란 당시인 선조 25년인 1592년 7월 1일 전라북도 전주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경기전의 태조 어용과 전주사고에 소장된 왕조실록을 맨 처음 피난시
혁명이라고 불리는 많은 사건들의 전후를 살펴보면 새로이 생겨난 것과 없어진 것의 차이가 극명하다.산업혁명도 예외는 아니어서 1, 2, 3차 산업혁명을 살펴보면 증기, 전기, 전자통신 등과 같이 각각의 혁명을 이끌고 새로운 시장을 이끈 주체로 이름을 붙이고 그로 인해 없어진 것들은 잊혀진다.없어진 것은 1, 2, 3차 산업혁명의 차수에 관계없이 ‘일자리’다. 그리고 혁명을 주도한 기술도 너무나 생활과 밀접해 져서 존재 자체가 잊힐 지경이 된다.마치 소를 찾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서 소를 발견하여 코뚜레를 꿰고, 길들이고, 집에 데리고
거조암은 영산전(靈山殿)에 모셔진 526분의 나한들이 기도 객들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나한 기도 도량이자 타락한 고려불교의 개혁을 발원한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이 작성된 곳으로 더욱 더 알려져 있다. 경상북도 영천시 포곡읍 신원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있는 은해사 산 내 암자이다. 정혜결사(定慧結社)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론(定慧雙修論)으로 세속화되고 정치와 결탁한 타락한 불교를 지양하고 선(禪) 수행에 전념하자는 불교 개혁 운동이었다. 이를 주도한 고려 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이 정혜결사를 하기 이전에 각 종파의 큰 스님들을 찾아 그 뜻을 알리고, 거조암에서 몇 해 동안 수행을 했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 교종과 선종을 통합시키면서도 불교계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에 따르면 지리산 성모천왕(聖母天王)이 “만일 세 개의 암사(巖寺)를 창건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라고 한 말을 따라 도선 국사가 세 암자를 창건하였는데, 곧 선암(仙巖)·운암(雲巖)·용암(龍巖)이 바로 세 암자라는 것이다.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되는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옛 선인(仙人)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 해 선암이라는 절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아도화상(阿道和尙)이 백제 성왕 7년인 529년에 비로암(毘盧庵)으로
불교과 풍수의 사상적 체계인 유식 사상과 우리나라 풍수 이론의 씨를 심은 절이 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월출산 남쪽 주지봉을 바라보는 넓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도갑사(道岬寺)는 신라말 헌강왕 6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사찰 이름답게 도(道)가 으뜸이라는 절이다. 신라말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왕조를 뛰어 넘어 인근 마을 출신이 출가해 중건했다. 바로 세종과 세조의 왕사 역할을 했던 수미 왕사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수미(守眉) 왕사는 왕실의 어명을 받들어 국가적 지원으로 966칸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세웠다고 한다. 부속 암자만 해도 상동암, 하동암, 남암, 서부도암, 동부도암, 미륵암, 비전암, 봉선암, 대적암, 상견암, 중견암, 하견암 등 12개암자를 둘 만큼 국찰로
불교란 무엇이고 부처란 무엇인가를 금강반야바라밀경 강론을 통해 남녀노소 누구라도 알기 쉽게 설법한 해안(海眼) 스님이 주석했던 절이 있다. 혜안 스님의 고향이자 출가한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있는 내소사(來蘇寺)이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에 혜구(惠丘) 스님이 한 이후 조선 인조 11년인 1633년에 청민(靑旻) 스님이 대웅보전을 중건한 설화와 이야기가 많은 절이다. 창건 당시는 소래사(蘇來寺)였다가 내소사(來蘇寺)로 바뀐 것은 신라가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중국 당나라군을 뜰여들일 당시 나당연합군의 총사령관 자격으로 온 소정방(蘇定方) 장군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고사리를 꺾기 위해 산에 올랐던 여인의 귀에 아기 울음소리가 나 가보니 그 자리에 육중한 바윗덩어리가 땅속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한 고려 왕실에서는 “이것은 큰 부처를 조성하라는 길조”라고 여기고, 금강산에 수도 중인 혜명대사에게 불상 조성을 요청, 온몸의 길이 19m, 둘레 9.2m, 귀 길이 2.7m, 눈썹 사이 1.8m, 큰 갓의 가로 3.3m라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조성했다.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般若山) 관촉사(灌燭寺) 석조미륵보살입상 창건 설화이다. 혜명대사가 석공 100명과 함께 그 솟아 나온 바위로 허리 아랫부분을 만들고, 가슴과 머리 부분은 그곳에서 12㎞ 떨어진 연산면 고정리의 우두촌에 있는 바위를 일꾼 1000명을 동원해 옮겨왔다. 그러나 이미 솟아 있